‘부산 서면 돌려차기 살인미수’ 사건 피해자인 민예진(가명)씨가 지난 3일 오후 서울 강남구 역삼동 거리에 서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형사소송법 제246조에는 “공소는 검사가 제기하여 수행한다”고 되어 있다. 국가가 범죄자를 재판에 넘기는 권리를 독점하는 ‘국가소추주의’(기소독점주의)를 채택하고 있다는 의미다. 범죄 피해자에게는 ‘증인’이나 ‘범행 목격자’의 자격만 부여된다. <한겨레>가 만난 10명의 강력범죄 피해자들은 대부분 피해 진술 외에는 수사와 기소, 재판과 선고 등의 과정에 관여할 기회를 가진 적도, 충분한 설명을 들은 적도 없다고 입을 모았다.
2021년 7월 중학생 딸의 성폭력 피해 사건 수사와 재판 과정을 경험한 40대 여성 이명선(가명)씨도 답답함을 호소했다. 딸에겐 피해자 국선변호사가 지원됐지만, 궁금한 것을 물으면 “기록을 열람해보면 나온다”는 답만 돌아왔다. 기록을 어떻게 찾는지 방법도 몰랐고, 심장이 떨려 사건 관련 문서를 읽기도 어려웠던 이씨는 그런 답변을 들을 때마다 ‘사선 변호인을 따로 선임할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검찰은 가해자에게 7년을 구형했지만, 재판에서는 징역 4년이 선고됐다. 형량이 적다고 여겼지만, 검사는 “살인죄도 징역 4년이 나온다”며 항소하지 않겠다고 했다.
‘부산 서면 돌려차기 살인미수’ 사건의 피해자였던 민예진(가명·27)씨처럼 피해자가 국선변호사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법무부가 관리하는 피해자 국선변호사는 성폭력, 청소년·아동 성폭력이나 학대, 장애인 학대, 인신매매 사건 피해자만 선임이 가능하다. 지난해 피해자 법률 조력에 나선 국선변호사는 모두 635명(전담 35명, 비전담 600명)이었고, 이들이 지원한 사건 수는 3만9161건이다. 형사사건의 피고인(가해자)을 변호하는 법원 소속 ‘국선변호인’들이 지난해 지원한 사건 수 12만2216건의 32%에 불과하다. 피해자들의 의사가 법률적 도움을 거쳐 수사와 재판 절차에 반영될 통로가 되레 피고인보다 좁은 셈이다. 공정식 경기대 교수(범죄심리학)는 “국가기관이 피해자보다 가해자를 위한다는 인식이 생기면, 국가 형벌권에 대한 불신이 확대된다”고 말했다.
수사와 재판 과정에 범죄 피해자의 심리 상태와 진술 등을 반영하겠다며 경찰은 2016년부터 ‘범죄피해 평가제도’를, 검찰은 2017년부터 ‘범죄피해 양형자료 보고서 제도’를 시행하고 있지만, 아직 초보 단계다. 29일 오영환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경찰청에서 받은 자료를 보면, 지난해 범죄피해 평가 실시 건수는 1696건에 불과하다. 범죄피해 평가 대상인 5대 강력범죄가 2021년 25만여건(절도 제외) 발생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미약한 수치다. 평가를 작성하는 피해자 전담 경찰관도 전국에 259명뿐이다. 게다가 평가는 의무 사항이 아니라서 강제력도 없다. 검찰의 ‘범죄피해 양형자료 보고서 제도’는 구체적인 현황조차 알 수 없다. 대검찰청 관계자는 “검찰 통계 시스템상 별도로 작성·관리하고 있지 않다”고 했다.
한국처럼 국가소추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미국은 보완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마련해왔다. 미국은 1970~1980년대 범죄 피해자의 권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연방정부와 의회가 1982년 ‘피해자·증인 보호법’, 1984년 ‘범죄피해자법’, 2004년 ‘피해자권리법’ 등을 잇따라 제정했다. 피해자권리법에는 ‘피의자에게서 보호받을 권리’, ‘절차에서 배제되지 않을 권리’, ‘배상받을 권리’, ‘검사와 상담할 권리’ 등 8가지 구체적 권리를 명시하고 있다.(이영돈, ‘미국의 범죄피해자의 법적 권리에 관한 고찰’, 2015년)
독일은 검사가 기소한 주요 강력범죄 등 사건 재판에 피해자나 그 친족 등이 법원의 허가를 받아 참여해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부대 공소’ 제도를 운영한다. 부대 공소인이 되면 피고인에게 직접 질문할 수 있고, 증거 신청 등도 가능하다. 독일은 국가소추주의를 원칙으로 하면서도 주거침입죄나 비밀침해죄 등 경미한 범죄에 대해 사인소추를 인정한다. 반면 ‘사인소추주의’로 출발한 영국은 국가가 아닌 개인이나 단체가 가해자를 기소할 수 있다. 비용 등의 문제로 활용 빈도는 낮지만, 범죄 피해자가 직접 가해자를 기소할 기회가 열려 있다.
일본만 해도 강력범죄 등은 법원의 허가를 받아 피해자가 재판에서 증인을 신문하고 피고인에게 질문을 할 수 있다. 스마일센터 총괄지원단장을 지낸 김태경 서원대 교수(상담심리학)는 “피해자는 검사가 자신의 이익이나 억울함을 대변해줄 거라고 기대하지만, 검사는 유무죄를 입증하는 게 우선이기 때문에 입장의 차이가 있다”며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별도의 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가윤 기자
gayoon@hani.co.kr 김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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