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서면 돌려차기 살인미수’ 사건 피해자인 민예진(가명)씨가 지난 3일 오후 서울 강남구 역삼동 한 카페에서 당시 상황 등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많은 사실을 언론 보도를 통해 확인했다. 가해 남성이 사흘 동안 도주하다 체포됐다는 사실도, 그가 경찰에서 “째려보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빠서 그랬다”고 진술한 사실도, 그의 혐의가 상해에서 살인미수로 바뀌었다는 사실도 모두 언론이 먼저 알고 보도했다. 사건 발생 두달 뒤에 열린 재판에 출석해서야 알게 된 사실도 있었다. 사건 당일 성폭행 피해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가해 남성이 재판부에 반성문을 제출했다는 사실이 그랬다. “모두 제가 먼저 들었어야 되는 소식 아닌가요?” 지난 3일 서울의 한 카페에서 <한겨레>와 만난 민예진(가명·27)씨가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민씨는 지난해 5월22일 발생한 ‘부산 서면 돌려차기 살인미수’ 사건 피해자다. 약속을 마치고 오피스텔로 귀가하던 민씨를 32살 남성이 엘리베이터 앞까지 따라와 돌려차기로 뒤통수를 가격하고, 이후에도 쓰러진 민씨를 발길질로 무차별 폭행한 사건이다.
이틀 만에 의식을 찾은 민씨는 16주 이상 치료가 필요한 외상성 두개내출혈과 발목 아래가 마비되는 영구장해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이런 신체적 피해보다 더 민씨를 괴롭힌 건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피해 당사자인 민씨가 철저히 소외됐다는 점이다.
범죄 가해자는 체포 직전에 미란다 원칙으로 권리를 고지받는다. “당신은 변호인을 선임할 수 있으며, 변명의 기회가 있고, 불리한 진술을 거부할 수 있으며, 체포적부심사를 법원에 신청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피해자는 수사와 기소, 재판과 피해 회복까지의 절차를 고통과 함께 견뎌야 하는데도, 누구도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개인은 소추권이 없고 국가기관인 검사의 공소에 의해서만 형사소송이 이뤄질 수 있는 ‘국가소추주의’ 원칙 영향이다. 물론 이 원칙 아래에서도 수사기관은 충분히 피해자와 함께 사건 처리 과정을 진행할 수 있지만, 민씨에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가장 어이없었던 건 자신이 어떤 상태로 발견됐는지를 사건 발생 두달 뒤 열린 재판에 가서야 확인할 수 있었던 점이다. 주변에선 트라우마를 우려해 만류했지만, 민씨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고 싶다’는 마음으로 법정을 찾았다.
재판 과정에서 민씨는 가해 남성이 자신을 시시티브이(CCTV) 사각지대로 옮긴 뒤 8분 동안 행적을 알 수 없는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 발견 당시에 자신의 바지 지퍼가 열려 있었고, 속옷이 벗겨져 오른쪽 종아리에 걸려 있었다는 사실 등을 알게 됐다. 민씨는 혼란스러웠다.
“사건 당시 기억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데, 저 스스로 어떻게 성범죄 피해를 당했는지 알 수 있을까요. 누가 성범죄 피해 사실을 인정하고 싶겠어요? 저도 아니길 바라지만, 이미 증거를 확보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이 지나버린 것 같아요.”
민씨에겐 형사재판에서 자신을 대리할 국선변호사를 선임할 기회도 없었다. 법무부 시행령에 있는 ‘검사의 국선변호사 선정 등에 관한 규칙’을 보면, 피해자 국선변호사는 성폭력·아동학대·장애인학대·인신매매 사건에만 선임할 수 있다. 살인미수 혐의는 해당하지 않는다.
심지어 민씨는 형사재판 도중에는 수사 기록과 각종 증거 열람조차 할 수 없었다. 결국 직접 변호사를 선임하고 가해 남성에 대한 손해배상 민사소송을 시작하면서 ‘원고’ 자격을 얻은 뒤에야 기록에 접근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사건 발생 후 5개월이 지나서야 시시티브이 영상 원본을 확보했다.
“저는 피해자인데 피해자는 재판의 당사자가 아니라고 해요. 피해자를 위한 변호사도 없고, 검사도 누구의 편이 아니라 잘잘못을 가리는 사람이잖아요. 그럼 제 편이 이 세상에 있는 건가? 하는 참담한 생각이 들었어요.”
가해 남성이 재판 과정에서 반성문을 제출하고 1심 재판부가 이를 참작해 검찰의 구형보다 8년 적은 징역 12년형을 선고한 사실도 민씨를 무력하게 했다. 자신에게는 사과 한마디 없던 가해 남성이 재판부에 반성문을 제출했다는 사실을 법원 누리집에서 ‘사건 검색’을 한 뒤에야 알게 됐기 때문이다.
“저도 용서를 안 했는데 어디에다 반성문을 내는 건가 싶었어요. 무슨 내용인지 보고 싶었는데, 저는 볼 권리가 없더라고요.”
사건 발생 10개월이 넘었지만, 민씨는 여전히 하루 2시간 정도밖에 못 잔다. 그것도 수면제를 먹어야 가능하다. 거리에선 불안함에 빨리 걷게 되고, 계속 뒤를 돌아본다. 일에 복귀했지만 집중력이 크게 떨어졌다. 인터넷을 열면 날마다 ‘증인보호 프로그램’과 ‘전자발찌’ 등을 검색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불안과 분노, 체념과 고통이 번갈아 오는 삶. 하지만 무엇보다 힘든 건 사건 이후 배제된 존엄성이다. “피해자가 물음표를 갖게 만드니까 사건을 더 잊을 수 없는 거고, 뭔가 존재를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어요. 피해자가 더 당당해야 하는데, 왜 가해자가 더 당당한 거죠?”
김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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