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쇄살인 사건 피의자 이춘재가 살해 사실을 자백한 ‘화성 실종 초등학생’의 실종 당시 유류품이 발견됐던 경기도 화성시의 한 공원에 2020년 7월7일 오전 유가족 등이 헌화한 꽃이 놓여 있다. 연합뉴스.
1989년 연쇄살인범 이춘재에 의해 살해된 ‘화성 실종 초등생’ 김아무개(당시 8살)양의 유가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승소했다.
수원지방법원 제15민사부(재판장 이춘근)는 17일 김양의 유족이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국가는 김양의 유족에게 2억2천만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했다. 재판부는 “경찰들의 위법행위로 유족이 애도와 추모를 할 권리, 김양의 사인에 대한 알 권리 등 인격적 법익이 침해되었다고 봄이 타당하므로, 국가는 김양 유족에게 그 정신적 손해에 따른 위자료를 배상할 의무가 있다” 고 밝혔다.
이어 “유족은 김양의 사망을 확인하지 못한 채 장기간 고통받았고 사체를 수습하지도 못했다”며 “(피해를) 어떠한 방식으로도 회복되기 어려운 점, 수사기관이 직무 태만을 넘어 조직적으로 증거를 은닉한 행위로 인해 국가에 대한 신뢰가 현저히 훼손되었는바 금전적 보상으로나마 손상된 신뢰를 회복시킬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재판부는 “유사 사건의 재발을 억제할 필요가 있는 점, 경찰의 불법행위 시로부터 이 사건 변론종결 시까지 통화가치에 상당한 변화가 있는 점 등을 고려하여 김양 유족 중 부, 모에 대한 위자료를 각 1억원으로, 형제에 대한 위자료를 2천만원으로 인정한다”고 밝혔다.
김양은 1989년 7월7일 낮 12시30분께 당시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에서 학교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사라졌다. 이 사건은 30여년 간 미제 가출 사건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경기남부경찰청 수사본부가 2019년 ‘이춘재 연쇄 살인사건’을 재수사하면서 이춘재로부터 “김양을 성폭행하고 살해했다”는 자백과 함께 “범행 당시 줄넘기로 두 손을 결박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이에 따라 수사본부는 당시 경찰이 고의로 증거를 인멸한 것으로 보고 김양 실종 사건 담당 형사계장 등 2명을 사체은닉 및 증거인멸 등 혐의로 입건했다.
이후 30여년 전 경찰이 김양의 아버지와 사촌 언니 참고인 조사에서 김양의 줄넘기에 대해 질문한 것이 확인되고, 사건 발생 5개월 뒤 인근에서 김양의 유류품이 발견됐는데도 경찰이 가족에게 사실을 알리지 않은 점 등을 종합할 때 혐의가 상당하다고 인정했다. 당시 딸이 연쇄살인 사건 피해자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김양의 아버지(69)는 취재진에게 “30년 동안 (딸이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지냈다는 게 너무나도 원통하다”며 “(당시 수사관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 왜 그 사실을 (가족들에게) 감춰서 뼈 한 줌도 못 찾게 했느냐. 이춘재보다 경찰이 더 나쁘다”고 말했다.
한편, 김양의 아버지는 이날 소송 선고를 두 달 앞둔 지난 9월 세상을 떠난 것으로 확인됐다. 김양의 어머니는 2년 전 소송을 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숨졌다. 이처럼 김양의 부모가 모두 숨지면서 김씨 부부의 아들이자 김양의 오빠가 홀로 소송을 맡게 됐다. 이에 김양 유족 변호인은 “부모로서 (주검을 수습하지 못하는 등) 마지막 희망까지 무너지니 크나큰 정신적 충격을 받아 사망에 이르게 된 것”이라며 손해배상 금액을 기존 2억5천만원보다 많은 4억원으로 변경했다.
김양의 오빠는 “동생의 소식을 기다린 30년보다 소송 판결까지 2년8개월을 기다리는 게 더 힘들었다”며 “재판부가 국가 책임을 인정하긴 했으나, 당사자인 경찰들이 이 사건에 대한 사죄를 꼭 했으면 한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오빠 김씨 쪽은 판결문을 검토한 뒤 항소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
김기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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