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대선 출마에 반대하는 ‘민주연대 21’ 소속 회원들이 31일 오후 서울 남대문 이 전 총재의 사무실 앞에서 불출마를 촉구하는 항의서한을 전달하려다 사무실 진입을 막아선 이 전 총재 지지자들과 대치하고 있다. 연합뉴스
여론추이 보며 정계은퇴·불출마 번복 저울질
이명박 지지율 급락 대비 ‘막판 대변화’ 환상
취약한 정당정치 틈 인물중심 패거리정치 꿈틀
이명박 지지율 급락 대비 ‘막판 대변화’ 환상
취약한 정당정치 틈 인물중심 패거리정치 꿈틀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출마설 강도가 높아지고 있다. 이에 따라 한나라당 안팎의 비판도 거세지고 있지만 이 전 총재는 31일 현재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고 있다.
이 전 총재의 이흥주 특보는 이날 “결단의 내용 자체가 굉장히 중요한 만큼 이른 시일 안에 결심하지 못하고 계속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불확실한 대선판에서 기회를 엿보는 이 전 총재의 태도와 그의 행보 속엔 한국 정치의 후진성이 그대로 녹아 있다.
우선 이회창 전 총재의 어정쩡한 태도를 두고, 상황 논리를 이유로 기존의 약속을 쉽게 저버리는 ‘정치적 기회주의’라는 비판이 나온다. 이 전 총재는 두 차례 대선에서 떨어진 뒤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올해 초 ‘정치 재개’ 관측이 나오자 기자회견을 열어 “대선에 다시 나올 가능성은 없다”고 부인했다. 하지만 요즘엔 대선 출마 여부를 두고 “무겁게 고민 중”이라고 말을 바꿨다. 주변 상황과 지지율을 지켜보며 정계은퇴 선언과 불출마 약속을 번복한 듯하다. 한나라당에선 이 전 총재가 비비케이(BBK) 사건으로 이명박 후보가 낙마할 가능성을 지켜보고 있다는 관측이 나돈다.
이 전 총재 쪽의 일부 인사들은 출마를 선언한다 해도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 변화를 지켜보며 완주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자신이 왜 나와야 하는지, 뭘 하겠다는 건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자기 반성도 없이 (이명박 후보 지지율 급락에 대비한) ‘예비 후보론’을 이야기하는 것은 명분이 없다”고 비판했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정치학)는 이 전 총재의 출마 움직임을 “2002년 막판 역전의 잘못된 학습효과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한나라당 후보 검증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아, 막판에 뭔가 터질 것이라는 기대감을 남겨둔 탓도 있다”고 덧붙였다. 강원택 숭실대 교수(정치학)는 “노무현 후보 때는 정치적 행로의 일관성과 적극적인 지지층의 호응을 갖고 있었다. ‘막판 한 방’으로 당선된 게 아닌데 정치권이 이를 자기한테 유리하게 해석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의 논란은 결국 한국 정당정치가 취약하다는 걸 방증한다고 많은 정치학자들이 지적한다. 대선이 정당 중심의 이념·정책 대결이 아닌 인물 중심 대결로 흐르다 보니, 기존의 여야 정당에 들어가 경쟁을 하기보다는 기회를 엿보다 밖에서 뛰어들어 단번에 대권을 차지하려는 욕구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 전 총재의 출마 고심에는 고질적인 ‘패거리 정치’ 모습도 나타난다. 그의 주변엔 과거 두 차례 대선에서 그를 도왔다가 지금은 한나라당 안에서 설자리를 잃은 ‘잊혀진 정치인’들 모습이 득시글하다. 지난 두 차례 대선에서 그를 도왔던 한 인사는 “주변에서 이 전 총재 출마를 부추기는 사람들이 많다. 일부 집단의 정치적 욕심이 국민을 혼란스럽게 하고 대선판을 흐리고 있다”고 말했다.권태호 기자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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