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원식 국방부 장관이 지난 7일 오후 국방부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밝히고 있다. 국방부 제공
씁쓸함을 지울 수 없다. 윤석열 정부의 국방 당국과 국민의힘이 지난 7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인 하마스의 이스라엘 기습 공격을 계기로 또다시 9·19 남북군사합의 무용론을 들고 나오는 모습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한국이 선진국의 반열에 올라섰다면, 정부여당은 대재앙으로 치닫고 있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 대해 우선적인 관심을 갖고 조속한 종전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도리에 맞을 것이다. 그런데 이 비극에 대한 관심보다는 마치 대한민국의 안보에 커다란 구멍이 생긴 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있다. 또 9·19 합의는 “위장평화”라며 이 합의를 체결한 전임 정부와 북한을 싸잡아 비난하고 있다.
9·19 합의 파기가 “소신”이라고 말했던 신원식 신임 국방장관은 10일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보다 훨씬 강도 높은 위협에 대한민국이 놓여있다”며, “9·19 군사합의에 따른 비행금지구역 설정으로 북한의 임박한 전선지역 도발 징후를 실시간 감시하는데 굉장히 제한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최대한 빨리 효력 정지를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국민의힘 윤재옥 원내대표 역시 “하마스 공격 계기로 9·19 합의를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며, “북한이 선제공격 하지 않을 거라는 선의에 기대는 건 수도권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9·19 합의는 △군사분계선(MDL) 기준 5㎞ 내에서 일체의 포병 사격 훈련과 연대급 이상의 야외 기동 훈련 전면 중단 △비무장지대(DMZ)의 감시 초소(GP) 11개 우선 철거 △MDL 기준 서부 상공은 20㎞, 동부 상공은 40㎞ 상공에서 고정익 항공기의 군사 활동 금지 △북방한계선(NLL) 이남 85㎞부터 NLL 이북 50㎞까지 완충지대 설정 등을 주요 골자로 한다. 이 합의를 두고 전임 정부여당은 남북한의 무력 충돌 방지에 크게 기여해왔고 강조해왔고, 현재의 정부여당은 안보를 위태롭게 만들어왔다고 반박해왔다. 이 와중에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터지자 정부여당은 그 불똥을 9.19 합의에도 붙이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남북관계와 이스라엘-하마스 관계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스라엘과 하마스는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타도’를 목표로 삼아왔다. 이에 반해 남북관계는 상대방의 존재를 ‘사실상’ 인정하는 기반 위에서 성립해왔다. 정부여당의 과거 정권들에 해당하는 박정희 정권의 7·4 남북공동성명은 그 ‘시작점’이었고, 노태우 정부의 남북기본합의서는 그 ‘이정표’였다.
또 당연한 말이지만, 대한민국의 목표는 북한을 침공해 무력통일을 달성하는 데에 있지 않다. 북한 역시 마찬가지이다. 단, 양측 모두 전쟁 억제를 추구하면서도 상대방이 침공해오면 격퇴뿐만 아니라 무력 통일을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이에 따라 9·19 군사합의의 유용성은 전쟁을 예방하는 데에 도움이 되느냐의 여부에 있다. 그런데 이 합의 체결 이후 5년 동안 위반 사례가 더러 있었고 군사적 긴장도 고조된 적이 있지만, 무력 충돌과 이에 따른 사상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이건 팩트에 해당된다.
물론 9·19 합의에 따라 일부 군사 활동에 제약이 생긴 건 사실이다. 정부여당과 보수 언론도 이 점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하지만 이건 군비통제의 기본 상식을 망각한 것이다. 군비통제의 근본적인 취지는 양측이 군사 활동에 제한을 두어 군사적 긴장완화와 신뢰를 도모하고 이를 통해 무력 충돌 및 전쟁을 방지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하여 이 합의로 군사 활동에 차질이 생겼다고 비난하는 것은 번지수를 한참 잘못 짚은 것이다.
9·19 군사합의 체결 때와는 달리 남북관계와 한반도 안보 정세가 크게 악화되었기 때문에 이 합의의 존재 이유도 사라진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생각을 달리할 필요가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 합의의 유용성은 더욱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관계가 좋을 때에는 상대적으로 무력 충돌이나 확전이 일어날 가능성은 낮다. 반면 관계가 나빠지면 상대적으로 이러한 위험은 커지기 마련이다. 대화를 통해 나빠진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이게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현명한 선택일 것이다. 접경 지역에서 군사 활동을 자제하기로 합의한 것이 남북관계가 악화된 오늘날 더 중요해진 이유도 바로 이 지점에 있다.
그래도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있다. 그런데 안보 불안의 근본 원인은 한국과 한미동맹의 군사적인 힘이 약한 데에 있지 않다. 이미 한국은 세계 6위의 군사 강국으로 올라섰고 세계 최강의 미국과의 동맹도 굳건하다. 또 북한의 감시정찰 능력은 아직까진 ‘안대’를 끼고 있는 수준인 반면에, 한미연합전력은 ‘고성능 망원경’으로 북한의 군사적 움직임을 실시간 감시정찰하고 있다. 이미 대북 억제 및 감시정찰 능력은 충분하다는 것이다. “9·19 군사 합의가 우리한테 불리하다”는 푸념은 이러한 한미동맹의 군사적 힘을 망각한 것이다. 남북이 근거리 감시정찰 활동은 자제하기로 한 반면에, 한미동맹이 원거리와 고고도 감시정찰 능력에 있어서 북한보다 압도적인 우위에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9·19 군사 합의의 효력 정지나 파기는 유비무환을 넘어 ‘과비유환’의 위험마저 품고 있다. 과도한 대비가 오히려 우환을 키울 수 있다는 뜻이다. 적개심으로 똘똘 뭉친 양측의 군대가 근거리에서 군사 활동을 벌이면 우발적 충돌과 확전의 위험은 높아질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 만들어본 표현이다.
이러한 위험이 커지는 것만으로도 한국의 안보뿐만 아니라 경제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수출로 먹고 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한국 경제의 대외 의존도는 매우 높다. 이에 반해 북한은 전형적인 폐쇄형 경제이자 대외 의존도가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나라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9.19 군사 합의가 사라져 무력 충돌과 전쟁 위험이 커지면 어떻게 될까? 북한 경제는 손해볼 것이 거의 없는 반면에 남한의 경제적 불안은 더욱 커지지 않을까?
정욱식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 wooksik@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