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9월19일 6자회담 수석대표들이 베이징 댜오위타이에서 9·19 공동성명 합의·채택에 성공한 뒤 환한 낯빛으로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왼쪽부터 크리스토퍼 힐 미국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 사사에 겐이치로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 우다웨이 중국 외교부 부부장, 송민순 한국 외교통상부 차관보,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 알렉산드르 알렉세예프 러시아 외교부 차관. 연합뉴스
전 세계의 시선이 러시아-우크라이나 및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에 쏠려 있다. 그래서 ‘두 개의 전쟁’이라는 말이 유행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유엔은 올해 1월에 전 세계 분쟁 수준이 2차 대전 종전 이후 최고치에 도달했다고 발표했다. 2022년 기준으로 전 세계에서 55개의 무력 충돌이 벌어졌고 2020년을 전후한 전쟁의 평균 지속 기간도 이전보다 약 3분의 1이 길어진 8~11년을 기록했다는 스웨덴 웁살라 대학과 노르웨이 오슬로 평화연구소의 공동 연구 결과도 유엔의 발표를 뒷받침해준다.
이러한 상황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우선 전쟁이 시작되면 휴전이나 종전을 도모하기가 매우 어려워지고 있다. 또 유엔이나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중재 노력이나 그 역량도 크게 줄어들었다. 심지어 강대국들이 직간접적으로 전쟁에 개입하면서 상황은 더욱 꼬이고 있다. “국제평화와 안정”을 위해 여러 가지 특권을 부여받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이 전략 경쟁에 여념이 없는 탓이 크다. 무엇보다도 갈등을 중재·해결해 전쟁을 방지할 수 있는 외교가 거의 실종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지구촌에 현주소이다.
‘전쟁은 시작하는 것보다 끝내기가 어렵다’는 교훈을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바로 한반도가 70년 넘게 종전도 평화협정도 없는 ‘정전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반도에서 또다시 전쟁 가능성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조성되고 있다. 2019년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좌초된 이후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한 위기의 징후는 최근 남북한이 9·19 군사합의의 무효화 수준을 밟으면서 더욱 커지고 있다. 우발적 충돌과 확전을 방지할 수 있는 ‘가드레일’ 하나가 제거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위기를 수습하려는 외교는 실종 상태에 있다.
2018년 12월에 중단된 남북대화는 1971년 이래 최장기간 공전 상태에 있다. 2019년 10월에 중단된 북미대화도 마찬가지이다. 북한은 대화의 문을 굳게 닫아걸고 있고, 한미는 “대화의 문은 열려 있다”면서도 이를 위한 실질적인 노력은 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한반도 위기를 타개할 대안은 없는 것일까? 나는 남북한과 미·중·일·러가 참여한 가운데 2003년부터 2008년까지 있었던 6자회담의 창의적인 부활이 필요하다고 본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위기관리의 유용성이다. 6자회담에 대한 평가는 다양할 수 있지만, 이 다자회의가 2000년대 전반기 한반도 위기를 관리하고 예방하는 데에 기여한 것만은 분명하다. 당시 미국의 부시 행정부는 북한을 이라크, 이란과 함께 “악의 축”이자 선제공격 대상으로 규정했고 북미 제네바 합의도 파기되었으며 북한은 핵무기 개발에 본격 나선 상황이었다. 또 미국은 한사코 북한과 양자대화를 거부하고 있었다. 6자회담은 이러한 상황을 수습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오늘날에도 남북·북미관계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데, 양자 대화의 가능성은 매우 낮다. 과거의 사례에 비춰볼 때, 또 대화가 위기 예방과 관리에 기여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6자회담의 유용성은 이 지점에서 찾을 수 있다.
둘째는 한반도 문제의 6자화이다. 최근 북중·북러 관계는 북한의 불가역적인 핵보유국 선포와 핵 고도화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초반 이래 최상이다. 특히 북·러간에는 군사협력마저 가시화되고 있다. 한미·미일동맹도 갈수록 강해지고 있고, 한미일 관계 역시 3자 군사동맹에 해당될 정도로 유착되고 있다. 이로 인해 한반도 문제를 둘러싸고 한·미·일 대 북·중·러의 대결 구도가 본격화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이는 거꾸로 6자가 모여 6자가 공히 한반도의 긴장 완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는 실현 가능성이다. 의장국인 중국은 6자회담의 재개가 필요하다는 원칙적인 입장과 ‘쌍중단’ 및 ‘쌍궤병행’으로 대표되는 균형적인 해법을 유지해왔다. 또 중국은 6자 가운데 다른 회원국들 모두와 소통이 가능한 유일한 나라이다. 최근 극심한 경쟁과 갈등을 겪어온 미국 및 일본과 정상회담을 한 것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러시아의 제안 역시 주목할 가치가 있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10월 19일 최선희 북한 외무상과 회담한 뒤 기자회견에서 북·중·러는 “전제 조건 없이 한반도의 안보 문제 논의를 위한 정기적인 협상 프로세스를 구축하는 것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6자회담을 특칭하지 않았지만, 내용적으로는 이를 의식한 발언이다. 한·미·일도 북한과의 대화 필요성을 꾸준히 제기해왔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볼 때, 6자회담 재개를 통해 한반도의 긴장 완화를 도모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
6자회담이 열리면 최대주의보다는 최소주의부터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당초 6자회담은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남북관계 발전과 북미·북일 관계정상화, 동북아 평화안보체제 구축을 목표로 삼았었다. 하지만 단기적으로 이러한 목표를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특히 한·미·일이 강조해온 비핵화나 북한이 요구해온 미국의 적대시 정책 철회가 그러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대주의 목표를 내세우면 6자회담은 말싸움으로 끝나고 추가적인 상황 악화로 이어질 공산이 커진다.
이에 따라 최소주의 과제를 설정해 이것부터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을 필요가 있다. 핵심은 한반도에서 우발적 충돌과 확전을 방지하고 무너진 군사적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조치를 마련하는 것이다. 이는 기존 합의를 되살리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다. 무너진 9.19 군사합의와 남북한 핫라인의 복원, 북한의 핵실험 및 탄도미사일 기술을 이용한 모든 발사의 중단과 대규모 한미연합훈련 유예가 이에 해당된다. 또 북·러 군사협력 중단과 미국의 한반도 전략자산 전개 및 한미일 연합훈련 중단도 논의 대상에 올려둘 필요가 있다. 6자가 무력 사용 및 사용 위협을 하지 않겠다는 소극적 안전보장을 천명하는 방안도 마찬가지이다.
6자가 ‘공동 연구 그룹’을 만드는 것도 고려할 법하다. 이 그룹에선 중장기적이고 근본적인 접근이 불가피한 사안들, 즉 한반도 핵문제 해결, 정전체제의 평화체제로의 전환, 동북아 평화안보체제 구축, 북미·북일관계 정상화, 동북아 군비통제와 군축 추진 등의 문제를 다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당사자들의 입장이 첨예하게 갈릴 수 있다. 회의체를 우선 공동 연구 그룹으로 제안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6자를 포함한 국제사회의 민간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모임이 되면 더욱 좋다. 민간 전문가들이 솔직하면서도 창의적이고 균형적인 의견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욱식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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