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21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여야 의원들이 방문한 서울 CJ대한통운의 택배분류 작업장 모습. 공동취재사진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지난 21일 야당에 의사일정 협의를 제안하면서 “임시국회에서 처리해야 할 중요한 입법과제가 남아있다”며 ‘생활물류서비스산업발전법’(이하 생활물류법)을 예시로 꼽았습니다. 이 법은 그동안 법의 사각지대에 놓였던 택배업을 제도화하는 내용이라 요즘처럼 택배가 일상화한 상황에 꼭 필요한 법 중에 하나죠. 문제가 됐던 화물업계와 택배업계의 갈등도 해결돼 국토부 장관 후보 인사청문회 일정 뒤에 순탄히 처리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문제는 민주당이 생활물류법을 ‘택배기사 과로사 방지법’으로 홍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택배기사 과로사가 생길 때마다 민주당은 생활물류법 처리를 거듭 약속하고 있습니다. 지난달 이낙연 대표도 한 택배 사업장을 방문해 “택배노동자들은 과로사 인정 기준을 넘는 노동을 하고 있다”며 “생활물류법 내용이 거의 다 조정됐으니 회기 내 처리하겠다”고 강조했는데요. 노동법도 아닌 생활물류법이 정말로 택배기사 과로사를 막을 수 있을까요?
생활물류법은 이름 그대로 ‘산업’ ‘발전’을 위한 내용입니다. 택배업을 등록제로 바꾸고 지원 근거를 마련하고 산업생태계를 조성하는 것이 골자죠. 이중 택배기사의 처우에 대한 내용은 △위탁계약 갱신청구권 6년 보장 △표준계약서 작성 및 사용 권장 △안전시설 확보 노력 등이 전부입니다. 택배기사들의 안정적인 계약을 유도하기 위해 6년 동안 위탁계약 갱신청구권을 법적으로 부여하는 것 외에는 모두 ‘권장’ ‘노력’ ‘권고’ 사항입니다.
택배기사 과로사의 주범인 택배상자 분류작업, 이른바 ‘까대기’에 대한 해결책도 담겨 있지 않습니다. ‘까대기’는 배송지별로 택배상자를 구분해 차량에 싣는 작업인데요. 업무 강도와 시간이 생명에 위협을 줄 수준이라, 택배업계 노사갈등의 근원으로 꼽혀왔어요. 그동안 노동계는 생활물류법을 통해서 택배기사의 업무 범위에서 분류작업을 명확히 제외하기를 기대해왔습니다. 지난 6월에 박홍근 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생활물류법 원안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있었지만 그마저도 지난 10월 발의된 수정안에는 빠졌습니다.
물론 수정안이 ‘택배서비스종사자’를 “화물의 집화, 배송 등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으로 정의하고 있기 때문에 분류작업이 제외된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이를 근거로 택배노조는 “이 법이 통과되면 택배기사 노동시간이 최소 3시간 이상 단축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어요. 하지만 법이 통과돼도 택배 현장에서는 “집화, 배송 등”의 문구에서 ‘등’에 분류작업이 포함되는지를 두고 공방이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달 19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에서 열린 공청회에서도 이런 문제가 드러났어요. 이날 심상정 정의당 의원은 “택배기사 과로사 문제는 노동자를 노동자로 인정해 주면 되는 것”인데 “정부·여당이 이 문제를 노동법의 변화로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꼬집었습니다. 택배기사가 지금은 특수고용노동자이지만 근로기준법을 적용받는 ‘근로자’가 된다면 당연히 노동시간 상한(주 최대 52시간)을 지킬 수밖에 없다는 거죠. 심 의원은 “근로기준법 적용과 원청 책임을 명문화하는 정도는 들어가야 과로사 방지라는 말을 붙일 수 있다”며 “이 법은 과로사 금지에 대한 면피용 법이 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노동계는 절박합니다. 공청회에 참석한 진경호 전국택배연대노동조합 수석부위원장은 “이 법에 부족한 지점이 있지만 아무 법·제도가 없어서 당하는 현재의 불이익, 장시간 노동의 고착화 해소를 위해 법조문 하나라도 절박하다”고 호소했습니다. “근로기준법 적용은 택배노동자들이 정말 절실하고 간절하게 바라는 바”이지만 그때까지 아무 대책 없이 기다릴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노동계 일각에서는 여전히 “생활물류법은 정부·여당의 면피일 뿐”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민주당 내에서도 ‘과로사 방지법’은 엉뚱한 별명이라는 반응이 나옵니다. 국토위 사정을 잘 아는 민주당 관계자는 <한겨레>와 통화에서 “이 법은 택배기사 노동권에 대한 법이 아니라 택배산업에 대한 법”이라며 “과로사 방지 같은 ‘가짜 쟁점’으로 법안을 홍보하는 것은 부적절할뿐더러 진짜 과로사 문제 해결에도 도움되지 않는다”고 설명했습니다.
택배노동자가 절박한 마음으로 생활물류법이라는 부실한 동아줄을 잡는 동안
정부·여당은 실질적인 특수고용노동자·플랫폼노동자 보호 대책에는 눈 감고 있습니다. 특수고용노동자의 열악한 처우를 방치하는 ‘미봉책’을 들고와 ‘과로사 방지법’이라고 말하는 지록위마는 언제까지 계속될까요?
이지혜 기자
godo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