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가 전임 시장의 성폭력으로 인해 치러지는데도 선거 기간 내내 ‘성평등 이슈’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발견하기 어려웠습니다. 양당 대결구도 속에서 ‘성평등’은 뒷전으로 내몰렸고, 이따금 권력형 성범죄가 여야의 정쟁 도구로 등장했을 뿐이었죠.
사실 유권자들은 전임 시장의 성폭력 문제를 중요한 선거 변수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겨레>가 케이스탯리서치에 의뢰해 지난달 30~31일 서울에 거주하는 유권자 1012명을 조사한 결과도 그랬습니다. 응답자들은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사건’(13.4%)을 ‘부동산 정책’(58.7%)에 이어 두번째로 중요한 선거 변수로 꼽았습니다. 최근 <한겨레>가 인터뷰한 청년 유권자 중에는 “2030에 있어서 가장 큰 이슈는 젠더 문제다. ‘양성평등은 좋은 거지’ 정도로 말하는 기존 정치 세력과 달리 젠더 정책 하나하나가 매우 크게 느껴진다”고 답하는 대학생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임 시장의 성폭력 사건은 야당이 쏘고, 여당은 막기 바쁜 정쟁용 ‘탄환’으로 전락하기 일쑤였죠. 본 투표를 하루 앞둔 6일에도 오세훈 국민의힘 서울시장 후보는 서울 노원구 유세현장에서 “내로남불이 뭐냐. 성폭행·성추행해도 우리 당이면 위인이 되는 게 내로남불 아니냐?”며 목소리를 높였어요. 권력형 성범죄는 특정 개인보다 조직 문화와 관행에 초점을 맞춰 개선해야 하는데, 국민의힘은 이를 더불어민주당에게 불어닥친 치명적인 악재 정도로 취급한 셈입니다.
민주당도 ‘방어 모드’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박원순·오거돈 전 시장의 성추행에 대해 민주당이 공식 사과도 했고 박영선·김영춘 후보가 연거푸 사과를 하기도 했지만, 근본적인 태도를 바꾸진 못했습니다.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 등 여권 인사들은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에 앞장서며 지지자 결집을 꾀하기도 했고요. 피해자를 ‘피해호소인’으로 불러야 한다고 했던 남인순·진선미·고민정 의원과 오거돈 전 시장의 변호인 등을 캠프 인선에 넣어 논란이 되기도 했지요. 박영선 후보가 직접 2차 가해 “자제”를 요청하고 문제가 된 인사들이 차례로 자진 사퇴하기도 했지만, 이미 논란이 너무 커져서 민주당에게 ‘권력형 성폭력’ 문제는 부담스러운 주제가 됐습니다. 한 민주당 중진 의원이 “애당초 민주당이 당헌을 고쳐 무리하게 출마한 것부터 진정한 반성과 제도개선을 추진하기 어렵게 만든 측면이 있다”고 비판할 정도입니다.
거친 정쟁 속에서 정책적 대안마저 생략됐습니다. 지난달 29·30일에 치러진 박영선·오세훈 후보의 토론에서도 성평등 이슈는 정쟁으로 소비되는 데 그쳤고, 깊이 있는 정책 논의를 찾아보긴 어려웠죠. 후보들이 내놓은 공약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울과 부산의 양당 주요 후보들의 5대 공약을 살펴보면, 오세훈 후보는 1인 가구를 위한 공약 가운데 하나로 여성 안전 문제를 다뤘을 뿐이고, 박형준 후보는 출산·돌봄 지원 등 성 역할 고정관념에 근거한 단편적인 공약이 전부였습니다.
박 후보는 여성 부시장제를 공약하는 등 여성 리더십 양성에 다소 관심을 보이기도 했지만 “10년 전 오세훈 시장이 하던 정책 수준을 못 벗어났다”는 전문가들의 쓴소리도 이어졌습니다. 민주당이 국민의힘보다는 보다 적극적인 공약을 내곤 있지만 권력형 성범죄 재발을 막고 성평등을 실현할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것은 매한가지입니다.
전문가들은 척박한 성평등 논의의 책임이 거대 양당에 있다고 짚었습니다. 성찰이 부족한 민주당과 애당초 성인지 감수성이 떨어지는 국민의힘이 양강 구도를 형성하며 ‘최악의 싸움’이 됐다는 평가입니다. 권수현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대표는 <한겨레>와 통화에서 “민주당은 박 전 시장 사건 초기부터 국면마다 가해자를 중심에 둔 대응을 보여줬고, 결국 선거 과정에서 성평등 이슈에 스스로 소극 대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국민의힘 역시 권력형 성범죄 문제를 구조적으로 바라볼 생각은 없이 선거용 비판만 이어왔다”고 비판했어요.
성평등에 집중한 소수정당들이 뚜렷한 존재감을 발휘하지 못한 것도 아쉬운 대목입니다. 서울시장 후보 12명 가운데 5명이 페미니즘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지만, 선거 기간 내내 지지율은 1% 미만(리얼미터 기준)에 그쳤어요. 김은주 한국여성정치연구소장은 “이번 선거가 대선 전초전의 성격이 강하다 보니 거대 양당의 필사적 다툼 속에서 성평등이 의제로 떠오르지 못했다”며 “당선 가능성이 작더라도 다양한 소수정당으로 향한 표심은 그 자체로 정치권이 다양한 정치적 욕망의 증거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짚었습니다.
이지혜 기자
godo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