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서울시장 후보(오른쪽)와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가 지난 17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열린 ‘매일경제 창간 55주년 기념 제30차 국민보고대회’에 참석해 악수를 나누고 있다. 공동취재사진단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상임선거대책위원장이 지난 22일 박영선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를 두고 “엄마의 마음으로 아이를 보살피고 기를 그런 마음가짐, 딸의 심정으로 어르신을 돕는 그런 자세를 갖춘 후보”라고 말해 적지 않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성차별 발언”이자 “점잖은 막말”이라는 지적들이었죠.
박 후보를 ‘칭찬’하려고 꺼낸 표현인데 이게 왜 성차별인지 의아한 분들도 계실 듯합니다.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를 속되게 이르는 “달창”이라는 표현이나, 여당 여성 의원을 “조선시대 후궁”에 빗댄 조수진 국민의힘 의원의 발언처럼 노골적인 성차별이 아니니까요. ‘엄마’든 ‘딸’이든 좋은 뜻으로 썼으면 문제없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이 위원장 본인도 의아해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 위원장은 지난해 7월에도 한 강연에서 “인생에서 가장 크고 감동적인 변화는 소녀가 엄마로 변하는 순간이다. 남자들은 그런 걸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이 먹어도 철이 안 든다”고 말해 비판을 받았죠. 이 위원장은 당시 “시대의 변화를 더 세심하게 살피겠다”며 사과했지만 이번에 비슷한 실수를 반복했습니다.
전문가들은 이런 종류의 발언을 “은밀한 성차별”이라고 부릅니다. 같은 성차별이지만 주로 칭찬의 형태로 나타나 알아채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겉으로는 출산한 여성, 효녀 등을 우대하는 듯 보이는 말인데, 사실 출산·육아·돌봄의 책임을 모두 여성에게 넘기는 발언이죠. 전통적인 성 역할을 따르는 여성을 칭찬하면서 가부장적인 질서를 공고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아빠들이 육아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 상황에서, 시대 흐름에 굉장히 뒤처진 언어 습관이지만 우리 정치권에서는 너무나 흔히 들을 수 있습니다. 여성 정치인을 가족 내 호칭으로 부르는 언어 습관도 문제입니다. 남성 정치인들은 ‘아빠 같은 시장’이나 ‘부산의 큰 사위’를 자임하지 않는데 여성 정치인에게만 ‘엄마’ ‘딸’ ‘아줌마’라는 단어가 붙어 다닙니다. 최근 박영선 후보도 유치원 친환경 무상급식을 공약하며 “엄마 같은 시장이 되겠다”고 말했죠. 민주당 양향자 최고위원과 진선미 의원도 최근 부산을 방문해 “부산의 큰며느리”라고 스스로를 소개했습니다. 이는 세심함과 친근함을 강조하는 표현 같지만 사실은 여성을 가부장적 질서 속에 묶어두는 언어들입니다.
지난 22일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박 후보를 비판하며 사용한 “도쿄 아파트 가진 아줌마”라는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발언의 문제점은 상대의 인격적 특성을 지워버리는 ‘아줌마’라는 단어가 갖는 여성 비하적 맥락만이 아닙니다. 실제 비판하려 했던 내용과 박 후보의 성별은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도, 안 대표는 굳이 여성을 지칭하는 사적인 호칭을 사용해 여성 정치인을 감정적이고 비합리적인 존재인양 끌어내리고 있습니다.
김은주 한국여성정치연구소장은 <한겨레>와 통화에서 “민주주의적 가치와 합리적 이성의 언어로 여성의 리더십을 설명할 줄 알아야 하는데 우리 정치권은 이를 고민해본 적이 없다”며 “여성의 역할을 계속 전통적인 가족의 언어로 설명해 여성을 공적 리더십에서 분리하고 있는 셈”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이 다양한데도, 여성을 ‘엄마’ ‘딸’ ‘며느리’로만 상상하고 표현하는 것은 일종의 ‘정치적 게으름’입니다. 여성에 대한 단편적인 사고방식이 정치 언어에 묻어나는 것이지요. 이런 언어 습관은 의식적이든 의도한 것이 아니든, 우리의 고정관념을 재생산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언어가 우리의 생각을 통제하기 전에 여성 정치인을 묘사할 새로운 표현을 고민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이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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