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난 16일 한-일 정상회담이 끝난 뒤, 도쿄 긴자의 오므라이스 노포에서 생맥주로 건배하고 있다. 도쿄/연합뉴스
권태호 | 논설위원실장
윤석열 대통령은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의 지난 16일 도쿄 정상회담에 ‘제3자 변제안’을 들고 갔다. 일본은 “깜짝 놀랐다. 이렇게 하면 한국 국내 정치에서 괜찮을지 모르겠는데, 우리(일본)로서는 학수고대하던 해법”이라고 말했다고,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이 언론 인터뷰를 통해 전했다. 앞서 윤 대통령은 <요미우리신문> 인터뷰에서 “구상권 행사를 상정하지 않고 있다”며 2018년 대법원 판결을 부정했다. 계류 중인 소송에 대해서도 추후 확정판결이 나와도 ‘제3자 변제’를 하겠다며, ‘일본에’ “걱정 말라” 했다. 행정부 수장이 미래 사법부 판결을 무시한 것이다. 이것이 ‘미래’인가.
‘국내 정치의 안 괜찮음’을 감수하고서 기대한 건 ‘최소한의 사과’와 ‘가해 기업의 미래기금 참여’였다. 그러나 기시다 총리는 “역사 인식에 대한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로 계승 확인한다”고 모호하게 말했다. ‘김대중-오부치’ 대신 “1998년 10월에 발표했던”이라 했다. ‘강제동원’도 “옛 한반도 출신 노무자 문제”라고 표현했다. ‘통석의 염’ 수준이다. 김 차장은 일본의 공식 사과가 20차례 넘는다고 했다. 사과를 하면 뭐 하는가, 그다음에 뒤집으면 앞의 사과가 유효한가.
한국은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를 철회했다. 2018년 10월 대법원 확정판결이 나자, 일본은 2019년 7월 불화수소 등 3개 품목을 대상으로 수출 규제에 나섰고, 8월에는 화이트리스트(수출심사 우대국)에서 한국을 배제했다. 이에 한국은 9월 세계무역기구에 제소했다. 이번에 일본은 수출 규제만 풀었을 뿐, 화이트리스트 복원은 ‘추후 협의’한다 했다. 한-일 군사비밀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은 완전 정상화하기로 했는데, 일본이 줄기차게 요구해온 것이다. 이것이 ‘국익’인가.
정상회담 뒤, <교도통신> 등 일본 언론은 ‘당국자’ 말을 인용해 “정상회담에서 한-일 위안부 합의 이행, 다케시마(독도) 문제 등이 언급됐다”고 보도했다. 이에 우리 정부는 “의제로서 논의된 바 없다”고 애매모호하게 말하지 말고, 사실이 아니라면 일본 언론을 상대로 소송을 하라. 한국에서 하던 것처럼.
여기에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후쿠시마 해산물 수입 규제, 2018년 해상자위대 초계기 갈등 등 청구서만 줄줄이 대기 중이다. 가는 말이 고우니, 오는 말이 험한 것이다. 이를 ‘호구’라 한다. 일본 언론들이 윤 대통령을 걱정하며 일본 정부에 촉구하고 있다. 너무 궁지에 몰아넣지 말고, ‘호응’ 좀 해주라고.
경색된 한-일 관계를 풀어야 한다는 데 동의하지 않을 국민이 누가 있겠는가. 언제까지 일본과 원수처럼 살 것인가. 그러나 이런 식은 아니다. 왜 이렇게 서둘렀을까. 4월26일 미국 방문 전에 매듭지어 미국에 칭찬받고, 5월 히로시마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도 초청받고픈 탓 아닌가, 추정할 뿐이다. 시간에 쫓기면 협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번 ‘해법’은, 한국 사회의 거센 반발에 부닥쳐 작동 불능 상태에 빠진 2015년 12월 박근혜 정부의 한-일 위안부 합의보다 더 형편없다. 당시 일본은 ‘사과’했고(‘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함’, ‘아베 내각총리대신은 ~ 마음으로부터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함’), 10억엔의 기금을 출연했고, 당시 외무상 기시다가 방한했다.
일본이 이번에 진심 어린 사과를 하고, 배상도 할 것이라는 발표를 기대한 한국인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대통령이 일본 총리에게 요구라도 했어야 되는 것 아닌가. 판을 깨라는 게 아니다. 이럴 수밖에 없었다면, 피해자들과 국민들에게 설명이라도 더 했어야 되는 것 아닌가. <요미우리신문>에는 9개 면에 걸쳐 인터뷰했는데, 그 정성의 반이라도 국내에 쏟아야 했던 것 아닌가. 정상회담 직전까지 예측도 못 하고 ‘일본의 성의’ 공수표만 날리고, 이제 와서 호텔 직원들 몇명 박수 친 걸 ‘환대’라 포장하니, 측은하기조차 하다. 왜 피해자인 우리가 ‘일본인의 마음’을 얻지 못해 안달이어야 하는가.
높은 ‘자리’에 있으면, ‘힘’과 ‘정보’가 모인다. 그러면 자신이 내리는 모든 결정이 옳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자리’와 ‘능력’을 혼동하는 것이다. 권위적이기까지 하면 다들 입을 닫는다. 그래서 자세를 낮추고 전문가, 그리고 반대하는 이들의 말에 귀 기울여야 실수를 줄일 수 있다. 윤 대통령은 지난 13일 국민의힘 지도부 만찬에서 “누군가는 부담을 지고 정리하고 가야 한다. 비난이 두려워 아무것도 안 하면 국익에 도움이 되겠냐”고 했다. 이런 말은 박수 칠 준비가 돼 있는 국민의힘 앞에선 굳이 할 필요가 없다. ‘부담’은 보이는데, 어떤 ‘국익’을 얻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니 최소한 이번 사태를 ‘성과’로 포장하지 말아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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