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오후 일본 도쿄 총리 관저에서 한일 확대 정상회담 후 열린 공동 기자회견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왜냐면] 신용호 | 전주대 법학과 명예교수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지난 16일 도쿄 총리관저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뒤 공동 기자회견에서 강제징용 문제를 “한반도 출신 노동자 문제”라 규정했다. 일본의 이러한 입장은 1945년 이전 한반도의 지위는 일본의 영토라는 것이다.
윤 대통령이 단순히 강제징용 문제 해결 방식을 넘어 일본의 이런 입장까지 동의한 것은 아닐 것이다. 만약 일본의 입장에 동의했거나, 동의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행위를 했다면 매우 잘못한 것이다. 이는 단순히 비인간적 강제징용 문제 해결의 차원을 넘어 한국의 독도 영유권에까지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행위기 때문이다.
전후 일본의 영토 획정과 관련한 중요한 조약은 1952년 비준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다. 일본은 이 조약 규정에 일본에서 제외되는 영역으로 독도가 포함돼 있지 않았기 때문에 독도는 일본 영토라고 주장한다.
이 평화조약은 조약의 당사자가 아닌 한국에는 효력이 없다. 그런데 한국이 당시 국가가 아니고, 그래서 한반도가 일본의 영토였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일본이 강제징용 문제를 ‘한국 노동자 문제’가 아니라 ‘한반도 출신 노동자 문제’라고 반복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종전 당시 한국의 국가성을 부인하고 한반도를 일본의 영토라고 주장하기 위한 관행을 쌓으려는 의도다.
일본의 이런 입장과 맥을 함께하는 국내 인사들도 상당히 있다. 1948년 8월15일을 대한민국 건국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분들이다. 이 주장은 결국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도를 포함해 한반도 전체는 일본의 영토였고,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의해 독도는 일본 영토에서 제외되지 않았으므로 계속 일본 영토라는 주장을 합리화시켜주는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처럼 일제강점기 한국의 국가성을 부정하는 일본과 국내 일부 인사들은 “국가는 국민, 영토, 주권으로 구성돼 있는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1910년 이후 한국은 주권을 상실해서 국가성이 소멸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국가 구성 관련 국제법과 국제 관행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주장이다. 하나의 국가는 이들 국가 구성 요소를 모두 갖춰야 건국될 수 있지만, 일단 건국된 국가는 일시적으로 주권이 상실되더라도 그 국가성은 쉽게 소멸하지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를 포함해 수많은 유럽 국가들이 독일에게 주권을 빼았겼지만 이들 국가는 소멸하지 않았다. 걸프전 당시 이라크에 주권을 빼앗겼던 쿠웨이트도 마찬가지다. 발트 연안의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는 1940년부터 옛 소련에 의해 51년 동안 주권을 빼앗겼지만 국가성을 유지하다 1991년에 주권을 회복했다. 국제 관행은 이들 3국을 1991년에 새롭게 수립한 신생국들로 다루지 않는다. 이들 국가의 국제법상 지위와 권리, 의무도 1940년 주권 상실 이전의 것을 그대로 승계했다.
국제사회에서 기존 법질서는 새로운 법률행위에 의해 새로운 법질서로 변화해 간다. 1910년 이후 우리나라는 주권을 상실했을 뿐 국가성은 유지했다. 그런데 일본과 한국 정부가 이를 부인하는 관행을 쌓아간다면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의 국가성이 부인되는 국제질서로 바뀔 위험이 있다. 일본 정부가 노리는 게 바로 이것이다.
윤석열 정부가 한일 간 미래지향적 차원이라는 이유로 강제징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반도 출신 노동자 문제’라는 일본의 입장에 동의하거나 동의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행위를 한다면 ‘한국이 일본의 독도 영유권을 인정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논리적 명분을 일본에 제공하게 된다. 같은 차원에서 일제강점기 한국 여성 성노예 문제를 다루는데도 일본의 의도에 말려드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인권의 문제인 동시에 영토의 문제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을 피점령국 국민이 아니라 ‘한반도 출신 민간인’으로 보는 것은 독도의 한국 영유권을 훼손하는 행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