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의 아시아나항공 인수·합병(인수 가격 1조8천억원) 빅딜로 외환위기 이후 20여년간 국내 재벌기업·기간산업에서 동종업계 거대 경쟁자들끼리의 인수·합병 역사에 관심이 쏠린다. 거대 인수합병에서 한국적 고유한 특징은 어떤 것들이 꼽힐까?
대표적인 사례를 보면,
현대자동차의 기아자동차 인수(인수 가격 1조2천억원·1998년),
현대중공업의 대우조선해양 인수(2조1000억원·2019년),
포스코의 대우인터내셔널 인수(3조3700억원·2010년),
SK의 하이닉스반도체 인수(3조3700억원·2012년),
한화의 삼성 석유화학·방산 4개 계열사 ‘빅딜’(대규모 사업교환) 인수(1조9천억원·2014년), 옛
현대전자의 LG반도체 인수(2조5600억원·1999년) 등이 있다. 여기서 자발적인 인수합병인 두 빅딜 사례를 제외하면, 인수·합병된 회사는 대부분 산업은행·수출입은행 등 국가 정책금융기관이 중심이 된 채권단 관리 아래 있었다.
대기업이 시장경쟁에서 실패해 부실기업이 돼 채권단 관리 아래 들어가면 △시장에서의 인수·합병 △워크아웃(기업구조개선작업)이나 법정관리를 통한 회생 모색 △국영기업화 △사모펀드 같은 금융부문의 인수 △시장에서의 최종 퇴출·철수 등이 사후 처리방안으로 거론된다.
그런데 기간산업부문에서 외환위기 이후 20여년간 재벌 대기업의 대형 인수·합병 역사를 거칠게 보면 업종이든 시대든 막론하고 다른 재벌기업의 기존 경쟁자가 부실기업에 빠진 상대편 경쟁자를 깜짝 인수하는 일이 빈번하게 되풀이 됐다.
대부분 산업은행 주도 아래 국가 ‘산업정책’ 접근으로 이뤄졌다. 이른바 ‘산경장’(산업경쟁력 강화 관계장관회의)나 옛
청와대 서별관회의(비공식 거시경제장관회의) 등의 자리에서 산업경쟁력 강화 명분으로 경제부처 장관들이 결정해온 것이다.
국책 정책금융기관이 여러 채권기관(대주단)을 지휘하면서 부실기업을 자회사처럼 거느리고 있다가 자력회생을 도모하기보다는 같은 업종의 대형 시장 경쟁자에게 매각하는 방식이다.
흥미로운 대목은 부실기업이 영위해온 해당 사업·업종에 진출하지 않고 있던 다른 대기업이 나서서 신규 사업으로 인수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는 점이다. 그 까닭으로는 기간산업에서 나타나는 한국적인 시장구조 특색이 지목된다.
대개의 우리나라 주력산업·업종의 시장집중도를 보면, 소수 재벌기업 소속 2~3개 회사가 시장을 분할 장악하는 과점·분점체제가 지배적이다. 재벌체제 바깥에서 오직 특정 사업만 전문적으로 영위하는 막강한 사업자가 존재하는 업종은 흔치 않다.
재벌체제는 다각화된 사업 영역에서 그룹 중심에 돈을 한데 모은 뒤 이 거대 자본력을 언제든지 동원해 투자·인수에 나설 수 있다. 문어발식으로 여러 업종에 진출해 특정 산업·업종의 국내외 경기변동 사이클(호황-불황 주기)을 타고 넘어가는 전략이다.
자동차가 잘 안 팔리면 조선업 호황에서 돈을 벌고, 조선이 또 불황에 빠져들면 철강·반도체에서 그룹 전체의 캐시카우를 벌어들이는 방식이다. 한편, 20세기 초 미국의 산업독점 시대에는 시장독점체제 유지를 위해 성장하는 군소 경쟁자들을 일부러 인수한 뒤에, 사업 확장이 아니라 시장에서 매몰비용처럼 폐기시켜 버리는 전략을 쓰기도 했다.
인수·합병 형식으로 보면, 경영 위기에 처한 경쟁자를 마치 구원투수처럼 나서 인수하는 모양새이지만 사실상 민간시장에서 자연스럽게 독점체제로 전환된다. 인수한 뒤에 두 회사가 여전히 시장 경쟁자로서 독자 사업을 영위하는 방식의 ‘인수’만 하든, 아니면 인수 후에 두 회사를 통합하는 ‘합병’까지 하든 재벌기업 2~3개 최상위기업의 시장 과점체제가 인수합병 이후 독과점으로 바뀌는 건 마찬가지다.
거시 국민경제와 소비자 처지에서 보면 시장에서 유효경쟁이 약화돼 경쟁적인 제품 가격 인하 등 측면에서 소비자 후생이 줄어들 수 있다. 현대차와 기아차의 경우 같은 사업을 영위하지만 기획-생산-판매까지 모든 과정을 한 그룹 안에서 두 경쟁 기업처럼 행동하고 있다.
중간지주사인 한국조선해양을 설립한 것을 보면 현대중공업도 대우조선 합병이 최종 승인되고 나면 두 조선사가 따로 제품 생산·판매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대한항공은 아시아나항공을 인수에 그치지 않고 장기적으로 통합한다는 구상이다.
또 한가지, 시장에서 경쟁에서 도태돼 실패한 기업이라해도 아예 퇴출되는 대기업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간판만 바뀌는, 즉 새로운 주인으로 바뀔 뿐이다.
해당 업종·시장에 거대한 재벌기업 경쟁자가 이미 존재한다는 점이 부분적으로 그 까닭을 설명해준다. 시장의 크기도 변수다. 시장 범위가 국내에 한정된다면 강력한 경쟁 기업의 몰락을 다른 경쟁자는 지켜보기만 할 것이고 홀로 독점기업이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훨씬 큰 글로벌 시장을 무대로 하고 있는터라 위기에 빠진 경쟁자를 적극적으로 인수·합병해 외형을 확장하려는 유인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기업은 주식가치뿐 아니라 성장성·수익성·안정성 등 세 가지가 기업가치를 좌우한다. 기간산업의 부실기업이 영위하는 사업들은 대체로 계속 성장을 구가하는 업종이다. ‘승자의 저주’이니 ‘성배 안에 든 독’이라는 우려도 나오지만 인수 매력이 적지 않은 셈이다.
한편, 대체로 우리나라 기업들은 부실기업이 돼 국책은행이 주도하는 채권단 관리 아래 들어가면 그 채권단 우산 속에 남아 있기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상 공기업 자회사 성격의 기업으로 처지가 바뀌어 각종 운영자금을 안정적으로 지원받고, 국가의 고용·일자리 최우선 정책노선에 따라 인력 구조조정도 그다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