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의출 옹이 떼가리라고도 부르는 뗏목을 타고 바다로 나갔다. 떼가리는 제주도의 테우와도 같은 것이다.
뗏목 타고 자연산 미역 건지는 칠순 노어부
나무늘보처럼 느릿느릿 만든 배
“할배요, 저거 타믄 무섭을 꺼 같은데요?”
“뽀개지마 몰라도 뒤집히지는 않는다”
발 딛고 선 현실 깨닫게 해준 ‘생각의 허’
나무늘보처럼 느릿느릿 만든 배
“할배요, 저거 타믄 무섭을 꺼 같은데요?”
“뽀개지마 몰라도 뒤집히지는 않는다”
발 딛고 선 현실 깨닫게 해준 ‘생각의 허’
이지누의 인물로 세상읽기/경북 울진의 뗏목 타는 어부 손의출 옹
때때로 누군가에게 생각의 허를 찔리곤 즐거울 때가 있다. 그렇게 찔린 허 만큼 스스로의 폭이 넓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을 산다는 것은 그처럼 무수히 허를 찔리곤 불쾌해 하거나 아니면 통쾌해하며 그로 인해 커 가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것도 자신이 더 많이 배웠을 것이라는 까닭모를 우월감에 사로잡힌 채 그렇지 못하다고 여겼던 사람들에게서 찔린 허는 더욱 깊고 아픈 법이다. 하지만 그 상처가 아물 무렵이면 자신의 허를 찌른 사람들의 지혜로움에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되니 나에게는 그런 경험이 겹겹이 쌓여 있다.
배운다는 것이 반드시 제도화된 교육 시스템 안에서라야만 가능한 것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누군가가 나를 가르치지 않았다고 해서 배우지 못하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그가 나를 가르치지 않았더라도 배울 것은 넘쳐나니까 말이다. 경북 울진의 바닷가를 거닐다가 만난 손의출 옹도 그런 분이다. 그이는 통쾌하게 내 생각의 허를 찔렀고 나는 기꺼이 그이의 생각에 동의하며 즐거워했다. 비록 그는 나를 대놓고 가르치진 않았지만 그이에게 배운 것은 한정 없이 큰 것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이는 일흔 셋이었다. 바닷가를 거닐다가 생뚱맞게도 백사장에 뒹굴고 있는 뗏목의 주인을 수소문 했더니 “그 떼가리가 내 낀데 무슨 일인기요?”라며 나타난 것이다.
바닷가 붙박이…학교는 서당이 끝
그로부터 열 너덧 차례, 울진까지 그 먼 길을 달려가서 그이에게 이야기듣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이의 집은 바닷가에서 열 발자국이나 될까, 태어난 자리에서 붙박이로 살고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바다를 논이나 밭으로 생각하고 살았다. 학교라고는 마을에 있던 서당에 다닌 것이 전부일 뿐 열일 곱 살, 어릴 적부터 배를 탔다고 했다. 동력을 사용하지 않는 작은 풍선(風船)을 시작으로 젊어서는 먼 바다까지 나가는 큰 배까지 선장 노릇도 했지만 지금은 헤진 그물코를 꿰거나 집 앞 백사장에 올라와 있는 뗏목을 타고 눈앞에 보이는 가까운 바다에 나가는 일이 전부이다. 그이가 뗏목을 타고 하는 일은 자연산 미역을 건지는 것이다. 그이가 떼가리라고 부르는 떼배는 오동나무를 엮어 만들었으며 한강이나 압록강을 떠내려가던 뗏목과는 그 길이만 짧을 뿐 모양은 다르지 않다. 한강이나 압록강의 뗏목이 쓰임새는 주로 목재 운반이었기에 소나무가 그 재료지만 그이의 떼가리는 오동나무 토막을 예닐곱 개를 엮었으며 길이가 3m남짓이었고 폭은 1.5m정도 되었다.
하지만 바람이 거센 날은 떼가리를 타고 나가지 못한다. 그런 날은 백사장에서서 긴 장대 끝에 갈쿠리를 매 단 까꾸리로 떠다니는 미역을 건질 뿐인 것이다. 그러니 날마다 잠들기 전이나 눈을 뜬 새벽이면 하늘을 살피고 바람을 만지는 것이 그이에게는 몸에 배어 있다. 더구나 이른 봄부터 늦봄까지 미역이 가장 맛난 때이니 한 철 벌이로는 쏠쏠한 셈이다. 하지만 바다에 뗏목이 떠 있는 정겹고도 낯선 모습을 흔히 볼 수 없는 것은 이제 귀찮게 오동나무를 엮어 떼배를 만들기보다 스티로풀 덩어리 두어 개를 묶어서 바다에 띄우는 편이 수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이가 바다에 떠 있는 모습은 귀한 장면이 되고 말았다. 나 또한 처음에는 그 생경스럽고도 정겨운 모습이 눈에 차 올라 그이를 만났지만 그이와 이야기를 나눌수록 그이는 내 마음 속의 스승이 되고 있었다. 어느 가을날이었다. 미역 철도 끝나고 한동안 쓰지 않을 것이니 아예 떼배를 해체하여 집 담장에 기대 놓은 것을 부득부득 졸라서 배를 만드는 과정을 보여 달라고 했다. 그이가 그물코를 꿰어 버는 일당을 내놓고도 한참을 매달려서야 겨우 허락을 받고는 바람이 잔날 해 돋는 무렵에 백사장에서 그이를 기다렸다.
리어카에 오동나무 토막을 실어 백사장으로 옮기고 다시 그것을 바다에 띄울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은 다음 나무토막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때부터 그이의 행동은 굼뜨기 시작했다. 어슬렁어슬렁 도무지 바쁜 일이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자리를 잡은 곳에 나무토막 하나를 내려 놓으면 먼 곳으로 가서는 한번 쳐다보고 다시 그 곁에 나무토막 하나를 놓으면 또 다시 먼 곳으로 가서는 그들을 서로 견주어 보는 것이었다. 그러니 후다닥 만들면 혼자서도 두어 시간이면 될 일을 대여섯 시간이나 하고 있었던 셈이다.
먼 곳에서 자신이 놓은 나무토막들이 제대로 놓였는지를 견주어 보고 어슬렁거리며 와서는 망치로 어느 하나를 툭 치고는 다시 가서 또 가늠하기를 반복하는 그이의 나무늘보 같은 모습을 견디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야 말로 바다에 떠 있는 뗏목을 만나는 것보다 더 귀한 모습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이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눈대중으로 가늠하고 앞에 놓은 것과 나중에 놓은 것을 서로 견주며 고르게 나무토막을 놓으려는 그 모습을 두고 아날로그니 디지털이니 하는 양분법적인 낱말로 구분하여 그이를 어디 한 곳에 소속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판단하는 것조차 그이에게는 아무런 쓸모없는 것이며 그저 나를 위한 편의였을 뿐일 테니까 말이다.
너덧 시간이나 지났을까. 나는 그런 그이의 모습에 마음속으로 박수를 아끼지 않고 있었다. 진정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사람이 온전히 자신의 몸을 움직여 할 수 있는 일은 그 무엇이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니 흔해빠진 사람의 숲에서 비록 돋보이지는 않지만 사람 그 자체의 모습을 잃지 않고 살고 있는 그이가 어찌 아름답지 않았겠는가. 나는 떼배를 만드는 과정을 눈여겨보고 촬영하여 기록하려던 생각은 잊어버린 채 어느덧 그런 그이의 모습에 취해 있었다. 만들다 만 채, 점심을 먹고 나와서 한두 시간이나 흘렀을까, 이윽고 그이의 떼가리가 만들어졌다.
그러자 그이는 무작정 바다로 떼가리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같이 타 보잔다. 일순 두려움이 밀려와 머뭇거리자 “괘않다, 젊은 아가 뭐 그래 겁이 많노. 나는 이거 60년을 타도 괘않다 말이다”라며 “산에 가마 흙을 밟아야 되는 기고, 물에 가마 물을 밟아야 되는 기라. 그라마 안 뒤집어지는데 산에 가가 흙 안 밟고 댕길라 카마 나무에서 떨어지는 기고, 물에 가가 물 안 밟으마 배가 홀까닥 뒤집히가 물에 빠지는 기라. 이거는 이래도 어데 바위에 부딪치가 뽀개지마 몰라도 뒤집히지는 않는다 말이라.”라며 나를 다독 거렸다.
바다 딛고 서니 울렁증 덜해져
그이의 말에 용기를 얻어 떼가리에 올라타자 바다의 울렁거림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오동나무 토막 성긴 틈새로 바닷물이 넘실거리며 들어 왔다가 사라지고 내 발은 이내 젖어버렸다. 과연 그이 말대로 바다에서 물을 밟고 있었다. 그러나 묘하게도 그 울렁증은 밑이 모두 막힌 배에서 느끼는 것과는 달랐다. 그이 말대로 옆이 트여 심리적으로 불안 한 것을 제외하면 울렁거림은 오히려 배 보다도 나았던 것이다. 그렇게 삼십분 가량이나 그이의 떼가리에 동승해 앞바다에 있는 미역바위까지 갔다가 돌아와서는 이내 해체를 했다. 그 일은 도와도 될성 싶어 서둘러 옮겨 놓고는 선선한 바람이 머물러 있는 백사장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할배요, 그래도 저거 타고 바다에 나가마 무섭을 꺼 같은데 정말 괜찮은기요?” 그러자 허허 웃더니 “내가 저거로 미역 한참 할 때는 한 철에 미역을 400단이나 했다 말이라. 한 단이 스무 필이고 한 필은 어른 양팔을 벌 리가 한발하고도 두 뼘이라, 그라이 얼매나 뽈뽈거리고 저 미역바우까지 왔다 갔다 했겠노, 미역 그기 물에서 건지마 억수로 무겁은 기거던, 그래 무겁은 거 싣고도 사고 한 번 안 나고 이때까정 하고 안 있나. 그라마 말 다 했지 더 무신 말이 필요하노, 안 그렇나.”
그이와 헤어지고 강릉을 거쳐 대관령 길을 오르면서 비로소 그이에게 찔린 나의 허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나는 지금 바로 여기, 곧 내가 발을 디디고 서 있는 현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이 한 세상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이가 떼가리의 나무토막 하나를 옮겨다 놓고 멀리서 바라보며 다른 것과 견주고 가늠하는 모습도 놓치고 있었던 것 중 하나이다. 누가 나를 그렇게 봐 주겠는가. 그 일은 오로지 스스로 해야 할 일인 것이다. 세상 속에서 그것 제대로 하지 못해 일을 그르치는 모습을 여럿 보지 않았던가. 이제라도 다시 추슬러야겠다. 언제라도 자기가 서 있는 곳, 그곳이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곳이며, 깨닫는 순간 그때가 가장 빠른 시간이니까 말이다.
그로부터 열 너덧 차례, 울진까지 그 먼 길을 달려가서 그이에게 이야기듣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이의 집은 바닷가에서 열 발자국이나 될까, 태어난 자리에서 붙박이로 살고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바다를 논이나 밭으로 생각하고 살았다. 학교라고는 마을에 있던 서당에 다닌 것이 전부일 뿐 열일 곱 살, 어릴 적부터 배를 탔다고 했다. 동력을 사용하지 않는 작은 풍선(風船)을 시작으로 젊어서는 먼 바다까지 나가는 큰 배까지 선장 노릇도 했지만 지금은 헤진 그물코를 꿰거나 집 앞 백사장에 올라와 있는 뗏목을 타고 눈앞에 보이는 가까운 바다에 나가는 일이 전부이다. 그이가 뗏목을 타고 하는 일은 자연산 미역을 건지는 것이다. 그이가 떼가리라고 부르는 떼배는 오동나무를 엮어 만들었으며 한강이나 압록강을 떠내려가던 뗏목과는 그 길이만 짧을 뿐 모양은 다르지 않다. 한강이나 압록강의 뗏목이 쓰임새는 주로 목재 운반이었기에 소나무가 그 재료지만 그이의 떼가리는 오동나무 토막을 예닐곱 개를 엮었으며 길이가 3m남짓이었고 폭은 1.5m정도 되었다.
손의출 옹은 바다에서 뗏목을 탄다. 오동나무를 엮어 만든 그것으로 미역을 건지는 일을 하며, 부인(앞쪽)은 미역을 널어 말리는 일을 하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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