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기 구겐하임〉
■ 20세기 예술계 대모의 남성편력
〈페기 구겐하임〉
못생긴 코가 도드라져 옆모습 사진도 뵈주길 꺼렸다는 이 여자 곁엔 언제나 남자들이 들끓었다. 미국 화가 로런스 베일은 “첫 남편이자 일생의 친구”였고, 둘째 남편 존 홈스는 “일생의 사랑”이었단다. 변기를 갖다놓고 ‘샘’(fountain)이라고 우겼던 마르셀 뒤샹은 “멘토이자 친구 그리고 아마도 연인”이었을 거라나. 일생의 친구와 사랑, 연인이 뭐가 어떻게 다른지는 별개로 하고, 어쨌든 이 여자 페기 구겐하임은 세상 뜬 지 30년이 다 되도록 ‘남자관계 복잡했다더라’며 남들 입에 오르내리곤 한다. 하지만 화려한 남성 편력이야말로 이 광산 재벌의 상속녀를 ‘파티광’이 아닌 예술 애호가로 성장시킨 거름이 됐다. 한때 피카소로부터 비싼 취미나 즐기는 ‘된장녀’ 취급을 받기도 했지만, 그가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면 잭슨 폴록, 이브 탕기 등 초현실주의ㆍ추상표현주의 거장들은 빛 한번 제대로 못 본 채 시들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책은 공적ㆍ사적으로 수집한 각종 자료와 출판물은 물론이고 일기와 통화 내용까지 그러모아 구겐하임이 20세기 예술계의 대모로 성장하는 모습을 재구성하고자 한다. 예술 중독자를 키운 연애담을 엿보는 맛은 쏠쏠하지만, 다소 두툼한 분량과 꽤 비싼 책값은 살짝 부담스럽다. 앤톤 길 지음ㆍ노승림 옮김/한길아트ㆍ2만5000원. 이정애 기자 hongbyul@hani.co.kr
■ 문명의 폭력 맞선 비문명의 전투교범
〈문명의 엔드게임 1ㆍ2 〉
이 과격분자를 보라. “문명은 지속 가능하지 않으며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위계질서 고위층의 재산은 하위층의 목숨보다 값지다.” “집권자들은 힘으로 통치한다. 사랑은 비폭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1권 7~9쪽) 데릭 젠슨. 올해 초에 국내에 소개된 <거짓된 진실>에서 증오와 폭력에 물든 문명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폭로했던 이 사람은 새 책에서 그 해결방법을 내놓는다. 서양장기 체스에서 승부를 가르는 마지막 국면을 ‘엔드게임’이라 한다. 문명은 지금 파국으로 치닫는 엔드게임. 먼저 1권과 2권을 통해 문명이 세계를 죽이는 23개 이유를 촘촘히 열거한다. 그리고 개인과 공동체, 토지를 파괴하는 문명과 어떻게 싸울 것인지 시범을 보인다. 그러므로 이 책은 문명과 환경파괴에 맞선 전투교범이다. 지은이는 민족과 계급을 제거한 자리에 온전히 문명과 비문명의 투쟁만을 채운다. 휴대전화 중계탑의 폭파, 정치요인 암살 등 온갖 섬뜩한 방법이 다 동원된다. 그러나 이 전투성은 다분히 몽상적이다. 폭력적인 문명에 맞선 비폭력적 문제해결은 결코 없다는 비유적 표현일 성부르다. 반대여론의 물길을 거슬러 한반도 대운하가 물꼬를 트고 있다. 책의 물길도 대운하 반대 쪽으로 숨가쁘게 흐른다. 데릭 젠슨 지음ㆍ황건 옮김/당대ㆍ1권 2만원, 2권 1만9000원.손준현 기자 dust@hani.co.kr
■ 우리 안에 갇힌 ‘국사’ 다시보기
〈밖에서 본 한국사〉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국내 뉴라이트 진영의 우익 국가주의 ‘대안’ 교과서…. 지금 한국사는 누구나 한 입장의 한복판에 서서 주먹을 움켜쥐고 분노해야 하는 주제가 돼버렸다.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한국사 논쟁의 소용돌이에서 새로운 전망은 불가능할까. 2002년부터 3년 동안 중국 조선족 사회를 관찰하며 구상했다는 <밖에서 본 한국사>는 국가 정체성과 민족 정체성의 분리에서 해답을 구한다. 국수주의의 뿌리가 민족주의보다 국가주의에 있다고 진단하면서, 민족주의와 국사를 청산ㆍ해체의 대상이 아닌 구조조정과 재구성의 대상으로 보자는 게 지은이의 제안이다.
책 속을 관통하는 ‘비교’의 시선은 우리 안에 갇힌 ‘국사’를 동아시아가 함께 숨쉬는 한국사로 재편한다. 예컨대 기자조선과 양자강 유역의 초ㆍ오ㆍ월나라, 한글과 원나라의 파스파 문자, 박정희 정권과 제국주의 시대 만주국의 구조 등을 견줘보는 것이다. 전국시대 진나라의 근교원공책을 자원 한계에 따른 성장의 둔화라는 조건과 연관시켜 보는 지은이는 앞으로 세계가 맞을 자원ㆍ생산력 한계와 긴축의 시대에 ‘동아시아’ 연대라는 새 질서가 필요질 것이라고 내다본다. 김기협 지음/돌베개ㆍ1만3000원.임주환 기자 eyelid@hani.co.kr
〈문명의 엔드게임 1ㆍ2 〉
■ 우리 안에 갇힌 ‘국사’ 다시보기
〈밖에서 본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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