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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익숙한 도발이 지르는 새로운 세계

등록 2007-02-01 15:23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박연준 지음. 창비 펴냄. 6000원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박연준 지음. 창비 펴냄. 6000원
잠깐독서/

80년생 여성 시인 박연준(27)씨의 첫 시집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을 ‘익숙한 도발’의 세계라 하자. 무릇 도발이란 상식과 예측을 깨고 수용자를 불편하게 만드는 충격을 수반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그런 도발이 ‘익숙한’ 성질의 것이라면? 그 도발은 충격적일 수 있을까?

“내 어린 손으로 활짝 핀 아버지를/꺾는다, 자귀나무 꽃이 붉으니/아버지 깊은 잠에도 꽃물 들겠지/나 죽으면 꽃잎처럼 하르르 떨어져내릴/아버지, 운 나쁜 나의 애인”(<봄의 장송곡> 부분)

“가엾은 죽음들이 생을 뒤집어쓰고 태어나는 소리,/아기는 엄마가 흘린 죽음이에요”(<안티고네의 잠> 부분)

박연준 시의 문면에서 느껴지는 충격은 한국 현대시의 전통이라는 필터를 거치면서 한결 누그러진다. “아버지를/꺾는”다거나 “아버지, 운 나쁜 나의 애인”과 같은 표현, 또는 신성한 새 생명을 두고 “엄마가 흘린 죽음” 운운하는 것은 확실히 충격적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충격적 발언이 그다지 새롭지 않다는 데에 있다. 최승자와 김혜순에서부터 김언희와 박서원, 최근의 김민정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여성 시인들은 가족을 비틀고 신체를 학대하며 인간과 생명을 모욕하는 데에서 꾸준히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왔다. 박연준씨의 시는 이 선배 여성 시인들의 시세계의 연장에 있는 셈이다. 후속 세대의 장점은 앞선 세대가 닦아 놓은 길을 편하게 걸을 수 있다는 것이지만, 자신만의 영토를 주장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어쩔 수 없는 단점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박연준 시의 배타적 영토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시집 해설을 쓴 김수이씨의 지적을 참조해 보자. 자궁과 생리혈, 가슴과 같은 여성적 지표가 시의 생산에 대한 비유로 이어지는 지점에 박연준 시의 개성과 독자성이 있다는 것이다. 다음 시들을 보라.

“나는 흐르는 내 생리혈을 손에 묻혀/속살 구석구석에 붉은 도장을 찍으며 혼자 놀래요”(<얼음을 주세요> 부분)

“시가 똥처럼 떨어진다/낳아놓은 똥은 죽은 걸까, 산 걸까?//냄새가 나는 걸 보니 썩어가고 있구나/똥 주위를 휘 돌아본다/이 죽어가는 걸 어떻게 살릴까/다시 내 속에 넣어볼까, 살아나려나­//그런데 너, 내가 더럽니?/내 시가 더럽니?”(<시> 부분)


최재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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