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나가던 스타 민중화가’ 외환위기 때 충격
전시장 벽 뚫고 나가 ‘당신도 예술가” 시민들에게 수작
거리와 산하 누비자 작품이 운동 되고 정신 되고
차별 편견의 칸막이 없애고
다같이 색칠하잔다, 아름다운 세상을!
전시장 벽 뚫고 나가 ‘당신도 예술가” 시민들에게 수작
거리와 산하 누비자 작품이 운동 되고 정신 되고
차별 편견의 칸막이 없애고
다같이 색칠하잔다, 아름다운 세상을!
권은정의 인터뷰 무제한/설치미술가 임옥상
사람들이 모여 기웃거리고 있었다. 서울시내 한복판 유명백화점 앞이었다. 교토의정서 발효 1돌을 기념하여 환경시계탑을 설치하고 기념식을 하는 중이었다. 환경부장관과 몇몇 유명인사들 가운데 임옥상 화백이 있었다. 저어새를 본 따 만든 환경시계가 그의 작품이었다. 쇠로 만든 새가 날개를 폈다 접었다 하는 모양은 행인들의 발걸음을 붙잡기에 충분했다.
우리나라 환경시간은 위험한 상황, 12시간 중 9시29분을 가리키고 있지만 사람들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쳐다볼 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귀빈들이 자리를 뜨고 뒷정리 담당 아저씨가 깔려 있던 붉은 카펫(사실은 플래스틱 제품이었다)을 둘둘 말아 올리고 있을 쯤에야 주위에 서성대고 있던 나는 임 화백에게 인사를 했다.
처음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더니, 책·지성 섹션 ‘18도’를 이렇게 기억해냈다. “아, <한겨레>에 끼워주는 거 말이지요?” 내겐 그말마저 ‘예술적’으로 들렸다.
전태일 반신상 세우는 데 10년
누구든 임옥상 화백이 민중예술계의 스타라는 데 이의를 달지 않을 것이다. 1970년대에 대학을 마친 그는 미술을 소통의 문제로 보았다. 80년대 그의 미술은 사회, 정치, 민중의 화두를 끈질기게 다루면서 다가올 세대를 예고했다. 당시 관점으로 보면 분명 ‘문제성’ 있는 바깥 작가였던 그도 90년대 초반 호암 갤러리 초대전시회를 시작으로 주류세계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인물로 떠올랐다. 이른바 ‘날리는 화가’로 외국 유명 갤러리에서 호평을 받으며 예술로 세계와 겨누어볼만하다는 자신감도 충만했었다. 그는 뉴욕으로 건너가 그림활동을 해볼까 하는 계획을 세웠었다. 그리고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하에 들어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당시의 사회적 위기를 자신의 위기로 삼을 수 있을 만큼 그는 현명하고 용기 있는 예술가였다.
“예술이란 게 사회적 산물이고 또 사회를 끌어가는 것이잖아요? 그 동안의 예술에 근본적인 회의를 가지게 되었지요.”
당시 그는 자신의 그림이 전시장의 벽을 위한 것이 아니었나 회의했다. 약간의 생각 끝에 그는 벽을 치고 거리로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길가는 시민들에게 “당신도 예술가”라며 4년간 1주일에 1번씩 한번도 빼먹지 않고 ‘수작을 걸어’ 마침내 그의 방식으로 일반인들과 미술, 예술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맨 처음 그의 작품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던 것은 매향리 작품이다. 불쌍한 우리 땅에 박혀있던 포탄조각으로 만든 작품 <자유의 신>. 그것은 매우 슬프기도 하고 엄숙하기도 하다. 마치 임옥상 그 자신이 서 있는 모습 같기도 하다. 임 화백은 원래 회화작가지만 지금은 더 이상 한 곳에 매이지 않는다.
“쇠로 작업을 하려면 자연히 용접을 해야 했지요. 새로운 재료에 대한 자신감이 생기면 그만큼 작품 세계가 넓어지고 상상력도 넓어져요. 상상이란 실현 가능성이 있는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이잖아요. 그전에는 뭔가 전체적으로 규격화된 부자유함 같은 게 있었는데 그 껍질이 없어져 가는 것을 느꼈지요. 기고만장해서 별 쓸데없는 상상을 하는 게 문제지만요. 하하하….”
설치미술가 임 화백의 작품은 전국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서울 쪽만 해도 5호선 광화문역, 난타 전용극장, 분당의 책 테마파크…. 임옥상 이름 하나로 작품을 만들어 여기저기 우뚝우뚝 세우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렇지 않다. 얼마 전 그가 청계천 변에 전태일 반신상을 올려 세우기까지 10년 세월이 걸렸다. 1996년 <광화문의 역사>를 할 때 전태일 얼굴을 넣고 싶어 했었다. 그때 이미 민주화가 되었던 세월이었건만 서울시는 냉정하게 거절했단다.
“오히려 잘됐어요. 이젠 거리를 만들었잖아요.” 그가 씩 웃었다.
그는 전시장을 뚫고 나와 거리와 산하를 누비며 만인이 공유할 작품을 만들어 왔다. 그의 작품은 운동이 되고 정신이 되어왔다. 이 정도면 그는 만족할까?
“이제는 밀도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후배들이나 많은 이들이 사회운동적 차원의 이슈가 될만한 것들을 많이 해내고 있다고 봅니다. 운동성도 가지면서 밀도를 높일 수 있느냐에 대해 고민해야지요. 뜻만 좋아서가 아니라 보다 높은 예술성을 가질 수 있느냐가 문제지요. 환경시계만 해도 사람들이 이 작품을 보고 야, 정말 멋있다. 괜찮다, 그러면서 이게 뭐야, 아, 환경문제를 이야기하는구나, 그렇게 가는 게 좋다는 것이지요.”
모두를 위한 예술 ‘임옥상이즘’
그가 온몸을 던져 내는 그 소리에 반응하는 메아리가 들리는가?
“기대하는 수준과는 아직도 거리가 있지만 조금씩 제 열정과 의욕과 용기를 북돋아줄만한, 불쏘시개 정도는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저런 것을 보면 너무 흔한 얘기지만, 꾸준히 좌절하지 않고 하나의 목표를 가진 삶의 태도를 가지면 되지 않는가 싶어요. 그러다보면 언젠가 시의적절한 기회를 포착할 수 있게 되거든요.”
그는 지금의 상황을 결코 예상하지 않았다. 자신의 예술이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고 사랑을 받게 될줄은 몰랐다. 그의 방향은 결코 의도된 것이 아니었다.
“예술가들은 감각을 가지고 있지요. 민중미술이란 것도 특유의 계산된 게 아니라 동물적 감각으로 하는 것이지요. 사회가 이런데 내가 예술가로서 이게 뭐냐, 죽는지 사는지, 잘 되는건지 아닌지, 어쨌든 나는 할 수밖에 없다, 이런 게 맞아떨어지는 것이지요.”
벽을 부수고 나온 미술, 하나 보다는 모두를 위한 예술, 임옥상의 작품은 공공성을 띠고 있다. 임옥상이즘. 그는 예술의 공공성을 어디까지라고 하는가?
“작품을 만들 때 나와 공공작품을 구분할 것이냐 말 것이냐, 애매모호하고 혼돈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공공미술이란 개념을 가지고 그냥 나가면 되지 거기서 임옥상의 작품은 뭐냐고 따지는데, 저는 거기에서 공공미술의 개념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사람들은 여럿이 함께 만든 작품과 혼자서 창작한 작품을 가지고 우열을 가리려고 하는데 이것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임 화백은 언제나 그와 대중들이 손을 맞잡은 가운데 예술이 완성되기를 원한다. 그의 역할이 무엇이기를 원하는가?
“전에 아이들과 동판작업을 할 때였어요. 옆에서 지켜보던 이들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아이들이 하나씩 할 때는 몰랐는데 모두 모아 보니 너무 감동적이다, 하나하나 살아 있다, 이것이 예술의 힘이라는 것을 알겠다고 하더군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작지만 진솔한 힘을 이끌어내서 어떻게 연출하느냐 그것이 전문가의 몫이 아닐까요? 대중들을 구경꾼처럼 방치하거나 폄하하는 시스템은 문제가 있습니다.”
쉰 중반의 그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하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에게 인기만점이다. 초등학생들과 학교담장 그리기 할 때 아이들은 그를 “옥상, 옥상”이라 불렀다.
“저는 아이들을 보면 그냥 장난치고 싶고 그저 좋아요. 만드는 결과물보다 아이들과 재미나게 보내는 시간이 너무너무 행복한 거지요. 우리 사회 전체가 동심을 회복하는 게 중요합니다.
임 화백은 문화운동 <문화우리>도 시작했다. 문화를 생활 속에 뿌리 내리게 하여 우리가 사는 공간과 환경이 보다 살만하게 만들자는 운동이다. 건축, 환경, 사회학자, 법조인 등등 각계전문가들이 모여 공공문화를 깊숙이 들여다보기로 하고 더 좋게 만들기로 다짐한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 사람들이 어울리는 것에 가장 높은 가치를 둔다. 그는 누구에게든 손짓한다. “이리와, 이리와.” 함께 어울려 이 세상을 아름답게, 멋지게 세우고, 색칠하고, 놀자는 말이다. 그가 말하는 벽없는 사회는 그림으로 칸막이를 없애자는 말이 아니다. 바로 모든 인간 사이의 차별과 편견을 넘어서자는 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어느새 난 이해할 수 있었다.
창조의 에너지 뿜는 검은 표범
그의 손 안에서는 끊임없이 새롭고 놀라운 작품들이 탄생한다. 그의 말은 간단없이 새로운 생각을 쏟아낸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말이나 글로도 그를 담아내기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찍이 그에게는 캔버스가 너무도 좁은 공간이었다. 서해 바닷가도, 이 도시도, 어느 공간도 그를 담기에는 비좁을 듯 했다. 한 마리 검은 표범인 듯, 그가 내뿜는 창조의 에너지는 뜨겁기만 하다. 그의 열정이 용암으로 흘러내려 땅을 데일 듯하여 순간 나는 발을 화들짝 들고 말았다.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권은정/전문 인터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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