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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esc를 누르며
대학 시절, 참하게(?) 생긴 덕에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으면 커피 한잔 뽑아 와서 살짝 놓아주던 남학생들이 몇명 있었습니다. 그러면 주는 커피나 조용히 받아 마시는 대신 덥석 손을 잡으며 ‘술이나 한잔 마시자’며 술집으로 이끈 탓에 10명 중 9명은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럼 나머지 한명은? 겨우 술집까지 유혹에 성공하면 2차 노래방에서 떨어져 나가더군요. 친구들은 ‘입만 열지 말고 가만히 있으면 그 남자들이 전부 네 것이 될 텐데 그 입을 열어서 꼭 사달을 낸다’고 나무랐습니다.
‘언니네 이발관’의 가수 이석원씨가 쓴 에세이 <보통의 존재>엔 이런 글이 나옵니다. 음악 하는 친구 셋이 자기가 살아온 내력에 대해 털어놓은 적이 있었답니다. 즉 누가 더 불행한 환경에서 자랐는가를 두고 은근한 경쟁이 벌어졌는데, 첫번째 친구가 포문을 열었습니다. “어렸을 적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신 이후로 어머니가 가장이 되셨다.” 두번째 친구가 받았습니다. “어릴 적 부모님의 이혼 이후 어머니와 거의 만나지 못하고 살아왔다.” 여기에 저자가 이야기를 꺼내자 모두 케이오당했다고 합니다. “우리 집은 신경정신과에 드나든 사람이 가족 중 세명이고 자살 시도 경험 있는 사람이 네명이 되며….” 여기까지 했더니 친구들이 벌떡 일어나 “형님 잘못했습니다”라고 했답니다.
저의 경우, 친한 여자친구 셋이 모이면 시작은 진지했지만 꼭 개그무림의 고수를 가리는 활극으로 끝이 납니다. 먼저 한명이 몸개그로 슬슬 분위기를 풉니다. 그러면 한명이 현란한 유머 입담으로 주변을 제압하려 듭니다. 그러면 나머지 한명은 기어코 배를 갈라 창자를 꺼내 줄넘기를 합니다. “이래도 내 앞에서 유머를 논해?” 그러면 나머지는 두손 두발 다 듭니다. 그중에서 아직 미혼인 여자친구는 묻습니다. “남자들을 웃게 만드는 건 나인데, 왜 연애는 다른 여자랑 하는 거지?” 그러면 나머지 친구들은 답합니다. “웃기는 남자는 유머러스한 남자인데, 웃기는 여자는 정말 ‘웃기는 여자’거든.” 남자는 웃길수록 ‘상한가’를 치지만, 여자는 웃길수록 몸값이 떨어집니다.
이번주 ‘김어준이 만난 여자’는 최근 개그우먼에서 가수로 변신한 곽현화입니다. 이 인터뷰를 읽어보면 한국에서 웃기는 여자들이 어떻게 소비되는지, 왜 개그우먼들의 웃음 코드는 ‘바보’이거나 ‘추녀’가 아니면 받아들여지지 않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슬프고도 웃기는 한국의 자화상을 ‘김어준이 만난 여자’ <“저 쉬운 여자 아니에요”>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김아리 〈esc〉 팀장 a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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