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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esc를 누르며
남편이 텔레비전을 보거나 인터넷을 할 때 버릇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한손으로 쉬지 않고 콧구멍을 후벼 파는 것입니다. 저러다가 코피가 터지고 말지 할 정도로 맹렬하고도 집요하게 코를 팝니다. 최근에는 제가 소리를 버럭 질렀습니다. 그만 좀 파라고. 그리고 다시는 내 앞에서 콧구멍을 파는 모습을 노출시키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까지 했습니다.
그러고도 제가 분이 풀리지 않아서 다음날 친구에게 씩씩거리며 “내가 이혼을 하게 되면 그건 반드시 콧구멍 파는 문제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친구가 물었습니다. “남편이 콧구멍을 파는 게 언제부터였어?” 그러고 보니 남편을 만난 지 13년이 됐고 그 버릇은 만난 초창기부터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걸 제가 인지하게 되고 분노하게 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라는 것 또한 알게 됐습니다. 친구가 제 어깨를 치면서 “그게 바로 권태기라는 증거야! 권태기의 정의가 뭔 줄 알아? 상대가 늘 해 오던 행위인데 그게 어느 순간 갑자기 꼴도 보기 싫어지는 게 권태기거든.”
개그맨 뺨치는 입담으로 유명한 장항준 영화감독도 한 예능프로에 출연해 결혼 3년 만에 찾아온 권태기 시절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자신의 아내가 입이 작아서 음식을 입에 넣고 남들보다 많이 오물오물 씹는데 어느날 갑자기 그게 너무 꼴 보기가 싫어서 밥을 같이 먹을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계속 그렇게 살다간 너무 괴로울 것 같아서 그 모습이 ‘귀엽다’고 자기 최면을 걸면서 그 시절을 이겨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이번주 〈esc〉에 실린 상담실 사연을 보니 남편이 콧구멍을 파는 문제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며 심지어 그런 걸로 고통을 받는 제가 얼마나 호사를 누리고 있는 것인지 깨닫게 됐습니다. 어린아이를 키우며 직장을 다니고 있는 여성이 상담해온 내용인즉슨, 남편이 가사와 육아를 전혀 도와주지도 않으면서 둘째까지 낳으라고 닦달하고 있다고 하네요. 상담 아래 실린 ‘강지영의 스트레인지 러브’ 칼럼에 실린 사연은 더합니다. 부인 몰래 자동차를 담보로 돈을 빌리고 카드빚까지 내어 주식 투자를 한 남편이 홀라당 돈을 다 날렸다고 합니다.
저처럼 권태기 증후를 앓고 있는 부부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습니다.
김아리 〈esc〉 팀장 a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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