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를 누르며
[매거진 esc] esc를 누르며
〈esc〉는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유난히 웃음에 대한 애정이 넘쳤습니다. ‘웃음의 강자들’ ‘웃기는 영화’ 같은 시리즈를 연재하기도 했고 마니아 팬들을 양산했던 ‘사용불가 설명서’는 근심과 걱정에 찌들어 누렇게 뜬 얼굴처럼 누런 신문종이가 상상할 수 없었던 황당무계하고 웃기는 칼럼이었죠. 늘 진지하던 공지영씨의 글조차 〈esc〉에서는 날아갈 듯 유쾌했습니다. 급기야 이번주에는 ‘웃기는’ 책 특집을 커버스토리로 준비했습니다. 이 사회의 공기여야 할 신문이 평소 희희낙락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대놓고 웃기는 책이냐, 고귀한 마음의 양식을 비하하는 것이냐 불쾌해하실 분도 어쩌면 있을 겁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신문의 사회적 역할도, 책의 교양적 가치도 존중합니다. 〈esc〉가 염증을 느끼고 바꿔보고자 했던 건 말투입니다. 그리고 말투는 태도와 관련돼 있습니다. 신문의 말투에는 어떤 클리셰들이 있습니다. ‘…에 따르면’ ‘…할 것으로 예상된다’ 등등 같은 말을 해도 딱딱하고 권위가 뚝뚝 묻어나오는 말투들이죠. 이런 신문의 말투는 태도를 규정하기도 합니다. 교장 선생님 훈시 같은 지체 높으신 분들의 칼럼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저 역시 신문 말투에서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했을 때는 어쩌다 칼럼을 써도 늘 개탄만 하게 되더군요. 웃자고 말하는 게 우리 세상의 어두운 부분, 열받는 일들을 다 털고 잊어버리자는 건 아닙니다.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이라는 근사한 한국판 제목으로 출판된 움베르토 에코의 충고처럼 정상 혈압을 유지하면서 살기 힘든 이 세상에서 뒷목 잡고 쓰러지기보다는 심각해지지 않는 게 이기는 싸움이 아닐까요? 2면에 소개한 15권의 책들은 ‘유머집’이 아닙니다. 유머감각이 주요한 매력으로 작용하고 있을 뿐 문학적 성취나 풍부한 교양, 또는 세상에 대한 통찰이 빛나는 책들이죠. 신문 칼럼에 자주 등장하는, 특히나 개탄을 전문으로 쓰시는 고명한 필자들께 일독을 권합니다. 장담컨대 이 책들이 보여주는 유연한 유머감각을 익히신다면 칼럼의 인기가 지금보다 100배는 올라갈 테니까요. 김은형 〈esc〉 팀장 dmsgud@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