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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esc를 누르며
‘웃음과 감동.’ 단어 조합의 클리셰 중에 가장 맘에 들지 않는 겁니다. 가장 식상한 코미디영화 카피이기도 하죠. 여기에는 웃음의 가치에 대한 은근한 폄하가 있습니다. ‘그저’ 웃기만 하면 허탈하다, 무의미하다, 남는 게 없다 등등. 그래서 찧고 까불던 코미디 주인공들은 영화가 끝날 무렵 눈물 뚝뚝 흘리며 회개하고 진지한 사람으로 거듭나곤 합니다. 하지만 전 웃음의 죄사함 같은 감동에 반대 한 표입니다. 웃는 게 죕니까? 제가 수많은 냉담자들의 외면(!)을 무릅쓰고 <티브이엔>을 좋아했던 이유도 이런 반감과 연관돼 있습니다. 물론 초창기 티브이엔은 선정적이다, 독하다 같은 부정적 평가 일색이었지만 분명히 이 채널에는 초기부터 지금까지를 흔들림 없이 관통하는 순수함이 있습니다. ‘쓰리벌떡’ 채널에 웬 순수함이냐고요? 하얀 면스커트를 입은 소녀가 자전거 타고 가는 광고 이미지가 아니라, ‘전혀 다른 것이 섞이지 아니함’이라는 사전적 의미의 순수함 말입니다. 다른 의도나 취지-예를 들면 ‘웃음과 감동’ 따위-가 섞이지 않은 100% 재미를 향한 열정이라고 할까요? 제가 티브이엔을 ‘비범한’ 채널이라고 느끼게 된 건 아쉽게도 시즌1로 막을 내린 <폰>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였습니다. 스튜디오에 전화기 하나 갖다 놓고 한 시간 내내 말 그대로 ‘장난전화질’만 해대는 이 프로그램이 빨리 종영한 건 당연해 보입니다. 점잖게 나라 걱정만 하는 어른들이 봤다가는 티브이를 ‘뽀개 버리고’ 싶을 만큼 한심한 프로잖아요. 하지만 저는 킬킬거리면서도 놀랐습니다. 재미를 위해서는 진짜 별짓을 다하는 사람들이구나, 언젠가 일 내겠다, 그런 느낌이었죠. 초창기 ‘선정성=재미’라는 단순하고 아마추어적인 감각을 뛰어넘어 ‘남녀 탐구생활’처럼 앞서가는 재미를 만들어낸 것은 이처럼 오로지 재미를 위해 별짓 다하는 시도 끝에 나온 결과물이겠죠. 하지만 ‘공감대’를 지향한다는 지금의 티브이엔이 문어발식 공감대로 가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보고 싶은 건 즐거운 채널이지, 착한 채널은 아니거든요. 김은형 〈esc〉 팀장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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