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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esc를 누르며
지난 주말에 영화 <국가대표>를 봤습니다. 결국 패배하는 이야기라는 건 알고 봤지만 그럼에도 나가노올림픽 경기 장면의 그 떨리는 긴장감과 흥분은 전혀 줄어들지 않더군요. 뭉클한 가슴과 찡한 코끝이 경기 직후 애국가를 부르는 장면에서 홀딱 진정됐지만 말입니다. <국가대표>뿐 아니라 지난해 개봉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그리고 이 계통 영화의 원조라고 할 만한 <쿨러닝>(1994)으로 거슬러 올라가기까지 ‘패배해서 더 감동적인 스토리’의 계보는 생각보다 유구하고 다양합니다. ‘참가에 의의를 둔다’는 올림픽 정신은 그저 정신일 뿐, 이기고 싶은 맘 없이 시합을 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승리의 기록보다 패배의 기록이 왜 더 드라마틱하고 흥미진진한 것일까요? 8월 초 승리의 기록을 쓰기 위해 망상해수욕장으로 고속버스 타고 떠난 고 기자의 풀 스토리를 보면 그 해답을 알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지난해 고나무 기자가 권투를 시작했다고 말했을 때 팀 분위기는 대체로 이랬습니다. “아니 왜애~?” 외모는 웰터급 ‘헝그리 스타일’이지만 곱게 자란 외아들의 성정을 가진 고 기자의 도전은 술자리에서 땅콩 안주처럼 가벼운 농담거리로 올랐죠. 가끔씩 사무실 구석에 손에 감는 붕대 같은 게 널려 있기도 했지만 그러다 말겠지 했어요. 올해 초쯤 고 기자가 아마추어 대회 출전 의지를 표명했을 때도 반응은 대체로 이랬습니다. “라운드 걸은 내가 할게” “파격적으로 삼각팬티를 입고 뛰면 어떨까?” 한마디로 웃고 넘겼다는 이야깁니다. 하지만 고 기자, 무덥던 8월의 어느 날, 도전자 허리케인 조처럼 글러브를 어깨에 메고 표표히 망상으로 떠났습니다. 예상했던 결과였지만 정리된 그의 기사를 보고 나니 도전은 도전만으로도 가볍지 않은 의미가 있음을 새삼 느낍니다. 하지만 승부욕 강한 고 기자, 여기서 물러날 사람 아닙니다. 1승 할 때까지 계속 도전하겠다고 비장하게 선언했습니다. 귀띔하자면 그의 설욕전이 조만간 있을 예정입니다. 후속 기사가 벌써 궁금하시죠? 김은형 〈esc〉 팀장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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