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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esc를 누르며
초딩이었던 1980년대, 그 시절 최고의 지성을 자랑할 수 있는 ‘독서’는 취미란의 고정 메뉴였죠. 특히나 모범생이었던 저는 ‘소년소녀 세계명작’ 따위의 수식어가 메달처럼 붙어있던 고전 소설 외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기준이 어찌나 엄격한 독서가였던지 만화책은 물론이거니와 셜록 홈스, 괴도 뤼팽 시리즈 같은 ‘착한 어린이’들도 즐겨보던 추리소설에도 콧방귀를 뀌었습니다. 그래서 제 독서 편력에는 코넌 도일이나 애거사 크리스티 같은 작가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도스토옙스키는 있느냐? 너무나 일찍 고전문학에 도전한 나머지 <죄와 벌>을 ‘6년째 78쪽 읽는 중’에 머물렀을 뿐이죠. 이런 습관은 성인이 될 때까지 이어져 일본 작가는 가와바타 야스나리 같은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나 다자이 오사무 같은 이름밖에 몰랐습니다.(역시, 이름만 안다 뿐…) 그러다가 불과 몇 년 전 미야베 미유키와 히가시노 게이고를 알게 됐습니다. 킬링 타임용이라 변명하며 우연히 보게 됐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고요? 뻔하죠. 너무너무 재밌잖아요! 재밌을 뿐 아니라 거기에는 수많은 인간 군상과 우리가 사는 사회가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21세기의 발자크 운운하며 괜히 추어올릴 생각은 없지만 대중소설은 ‘싸구려’라는 오랫동안의 선입견이 싹 날아가 버렸습니다. 이후로 고전, 또는 순수문학을 구분하는 강박도 사라지고 장르소설도 열심히 챙겨 보게 됐죠. 제가 유달리 고루했던 것도 같지만 저만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한국 문학계만 봐도 노벨 문학상에 대한 열망은 남북통일 못지않게 열렬한 듯한데 볼만한 대중소설의 질과 양은 일본에 비하면 여전히 새싹에 물 주는 수준에 불과합니다. 해맑은 독자 처지에서 말하자면 노벨 문학상 작가가 배출되는 것보다 한국에서도 미야베 미유키나 온다 리쿠 같은 탁월한 장르소설 작가들이 많이 배출됐으면 좋겠습니다.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은 기쁨과 함께 근심도 주지만(아~ 읽긴 읽어야 할 텐데…) 뛰어난 대중 작가는 언제나 기쁨과 설렘만 주니까 말이죠. 김은형 〈esc〉 팀장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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