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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esc를 누르며
막상 하면 즐겁지만 좀처럼 하게 되지 않는 것. 저에게는 등산입니다. 향긋한 나무 냄새 맡으며 숲길을 걷다 보면 저절로 행복해지지만 그곳에 도착하기까지 산행을 주도한 사람-주로 직장 상사죠-에 대한 증오심에 불탑니다. 그러나 행복한 것도 그때뿐, 등산을 해볼까 맘을 먹다가도 자발적으로 산행을 해본 적은 없습니다. 그러니 등산복이나 장비 따위 관심 밖이었죠.
제 생각이 바뀐 건 지난해 가을 독자들을 대상으로 진행했던 〈esc〉와 함께 가는 대한민국 패키지 여행의 한 프로그램으로 지리산에 갔을 때였습니다. 한참 산을 걷다 보니 버스 한 대를 오붓하게 채울 만한 숫자의 등반객 가운데 등산복을 ‘착장’하지 않은 사람은 저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애써 차려입은 듯한 모습은 없었지만 등산 바지에 셔츠나 점퍼 정도는 챙겨입은 참가자들 중에서 후줄근한 면바지에 ‘야근 작업복’으로 즐겨입던 검은 평상복 점퍼를 입은 제 차림새가 과연 독보적이더군요. 오래전 친한 선배의 강권으로 가입했던 산악회에 꼬박꼬박 회비만 납입해온 공을 치하해 선물받은 등산화마저 없었더라면 요 아래 식당에서 음식 배달 왔다고 해도 다들 믿었을 겁니다. 불과 2, 3년 전만 해도 이 복장으로 산에 가면 ‘동지’들이 산 중턱과 꼭대기에서 헉헉대며 반갑게 눈인사를 했을 텐데 말이죠, 지금은 마치 속옷 차림을 비키니라 우기며 바다에 들어갔다는 전설 속의 인물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 산행 이후 한동안 제 가장 큰 소일거리는 홈쇼핑 채널의 아웃도어 제품 쇼 시청이었습니다. 관심을 가지고 보니 이 채널 저 채널 아웃도어 전쟁이더군요. 아니나 다를까 홈쇼핑 수익에서 아웃도어 판매 비중이 엄청나게 늘어났다는 기사도 봤습니다. 이번 표지기사를 보니 지난겨울 고딩 조카가 50만원도 넘는 바람막이를 사달라며 엄마에게 떼를 썼던 이유도 알겠습니다. 하지만 뭐, 복장 좀 안습이면 어떻습니까.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이 시점에 에어컨 아래서 눌어붙은 엉덩이를 털고 산행 한번 하시죠.
김은형 〈esc〉 팀장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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