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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esc를 누르며
저를 ‘미드’에 폭 빠지게 만든 장본인은 길 그리섬(윌리엄 엘 피터슨)입니다. 그는 〈CSI: 라스베이거스〉의 주인공입니다. 2000년 첫 시즌에서 그는 꽤나 잘생기고 지적인 풍모를 가진 사람이었지요. ‘애정과잉’이라는 치명적인 병을 앓고 있는 저로서는 어딘가 차갑고 냉철한 이성이 돋보이는 그가 너무 좋았습니다. 그가 과학수사대를 떠나는 시즌 9에서는 지치고 늙어 보였지만 그래도 좋았습니다. 세월을 따라 굵게 맺힌 그의 주름도 우리 인생 같아 좋았습니다. 광팬이 된 저는 동네 디브이디 대여점에 시간만 나면 불나방처럼 달려 들어가 ‘시에스아이’를 찾곤 했지요. 첫 장면은 언제나 똑같습니다. 과학수사요원들이 사진을 찍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찰칵찰칵! 사진기자인 제 눈을 확 잡았습니다. 그들은 니콘 카메라에 링 플래시를 달고 사진을 찍고 있었습니다. 왜 니콘일까 궁금했지요. 나중에 안 일이지만 니콘 카메라가 이 드라마에 후원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 촬영을 할까 또 궁금했습니다. 범죄사진 취재는 바로 이 의문점에서 출발했습니다. 범죄사진은 경찰들이 찍는 사진입니다. 범죄와 연결된 사악한 기운의 사진들이지요. 문득 다른 의문이 생겼습니다. 촛불시위 같은 평화적인 시위 현장에 나가면 커다란 망원렌즈를 달고 셔터를 누르는 경찰관들을 봅니다. 그들은 ‘광장’에 나온 사람들을 향해 사진을 찍습니다. 이른바 ‘채증사진’이라는 겁니다. 그들은 경찰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찍는 사진은 범죄사진일까요? 그 사진에 담긴 우리들은 범죄인일까요? 그들은 과학수사요원들이 아니라 정보과 형사들입니다.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엽기적인 사건이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는 요즘, 경찰들이 메고 있는 카메라와 플래시는 시민들이 아니라 사이코패스를 향해 팍팍 터져야 하지 않을까요!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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