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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esc를 누르며
누런 흙바닥에 소나무 몇 그루가 덩그러니 서 있었습니다. 어느 황무지의 풍경이 아닙니다. 1980년대 대전야구장의 외야석이 실제로 그랬습니다. 야구를 보러 왔다기보다 소풍을 온 것에 가까워 보이는 관중들은 그곳에 돗자리를 펴고 삼겹살을 구우며 소주 파티를 벌였습니다. 그러다 홈런 타구라도 날아오면 황급히 피하는 모습들이 텔레비전 중계 화면에 잡히기도 했습니다. 외야석에서 고기 구워 먹었다는 풍습은 다른 지역의 구장에서도 역시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습니다. 선수들로서는 참으로 힘 빠지는 풍경이었겠습니다만 그래도 차라리 들놀이라도 온 듯 무심한 게 나았습니다. 간혹 경기 중에 실책을 범하거나 지기라도 하면 욕설은 물론 오물까지 뒤집어써야 했으니까요. 지금도 그라운드에서 뛰고 있는 프로야구 선수들 중에는 90년대까지도 이어졌던 야구장 관중석의 그 어두웠던 문화를 기억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외야 수비를 하다 관중이 던진 닭 뼈다귀에 맞아 본 적도 있다는 어느 노장 선수는 최근의 확 달라진 관중 문화에 대해 ‘감격스럽다’고까지 합니다. 아직까지도 관중들의 구태가 종종 보도되고는 합니다만, 이제 그건 극히 일부에 가깝습니다. 오히려 그런 일이 일어나면 나머지 다수의 관중들이 ‘집에 가!’라고 합창합니다. 그야말로 세대가 바뀌면서 양화가 악화를 밀어낸, 기분 좋은 광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희한하게도 야구장에만 가면 어디선가 선선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제아무리 낮 기온이 30도를 넘으며 찜통더위가 기승을 부렸다는 날에도 말이죠. 맥주 한잔과 함께 목청껏 불러보는 응원가와 선수들의 열정적인 플레이에서 비롯되는 열기도 캠프파이어의 모닥불처럼 유쾌하기만 합니다. 멀리 떠날 계획일랑 세워놓지 않으셨다면 단돈 만원도 안되는 돈으로 자연의 바람과 벅찬 흥분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야구장으로 피서 가시길 권합니다. 조민준/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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