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ESC

애증보다 진한 제빵 이대

등록 2009-06-17 20:51수정 2009-06-17 20:52

리치몬드 과자점 권형준(34) 총괄팀장
리치몬드 과자점 권형준(34) 총괄팀장
[매거진 esc] 너는 내운명




리치몬드 과자점 권형준 팀장의 제과제빵 도구

아버지와 같은 직업을 선택한 자식의 심정은 어떤 걸까? 소설가 한승원의 딸 한강, 영화배우 최무룡의 아들 최민수, 가수 신중현의 아들 신대철,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의 딸 라일라 알리 등에게 물어보고 싶을 때가 있다. 당신들에게 아버지는 어떤 존재였느냐고 말이다.

리치몬드 과자점 권형준(34) 총괄팀장에게 물었더니 “애증”이라고 답한다. ‘운명’을 상징하는 도구를 보여 달랬더니 천으로 돌돌 만 것을 가져온다. 풀었더니 제과제빵 도구들이 꽂힌 가방임이 드러난다. 프티나이프, 스패튤러, 엘(L)자 스패튤러, 빵칼, 에코놈(필러)이 가지런히 꽂혀 있다. 프티나이프는 단어 뜻 그대로 작은 칼이다. 과일을 자를 때 주로 쓴다. 권 팀장이 요새 가장 많이 손에 쥐는 게 스패튤러다. 납작하고 긴 모양과 옆에서 봤을 때 로마자의 엘 자 꼴로 구부러진 모양의 두 종류가 있다. 케이크 만들 때 생크림을 펴 바르는 데 사용한다. 권 팀장은 뾰족한 모양의 큰 펜촉처럼 생긴 필러를 에코놈이라고 했다. 과일 등의 껍질을 벗기는 데 쓴다.

아버지 권상범 사장은 김영모씨와 함께 한국 제과제빵 1세대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장인이다. 권 팀장이 아버지처럼 스패튤러와 에코놈을 운명의 도구로 받아들인 것은 꽤 늦다. 지자체의 홍보 포스터에 나올 법한 웃는 얼굴로 “가업을 이어 행복합니다”라고 말하는 일은 20대의 권 팀장에게 일어나지 않았다. 경제학을 공부했고 2001년 도쿄(동경)제과학교에 들어가서도 진심으로 제과를 천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리치몬드 과자점 권형준 팀장의 제과제빵 도구
리치몬드 과자점 권형준 팀장의 제과제빵 도구

“아버지의 직업은 공기 같은 게 아니겠느냐”고 슬쩍 아는 체를 했다. 직업의 스승은 2001년 도쿄제과학교에 다닐 때 수습생으로 일하던 과자점의 하마다 하쓰히코라고 그는 답했다. “수습생으로 갔던 곳에 계셨는데 아버지보다 한 살 많았어요. 그때까지 제과제빵은 인간이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분은 너무 유쾌하게 일하는 거예요, 노인네가. ‘이 일도 재밌겠네’라는 감동을 스물일곱 살 때 처음 한 거죠. 저도 리치몬드 스태프들에게 이 일도 재미있겠다는 감동을 주고 싶어요. 그때부터 아버지가 한국에 돌아오라 그래도 안 돌아갔죠.”


하마다 하쓰히코는 직업의 스승이고 아버지는 인생의 스승이라고 권 팀장은 말했다. 제과제빵에 대한 철학 때문에 아버지와 논쟁도 한다. 권 팀장은 1세대가 유럽이나 일본의 제과제빵 전문가들에게 지나치게 이론적으로 기댄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우리 걸 해보자는 거죠.” 유럽 스타일의 제과를 시도하고 싶지만, 공장 직원만 30명이 넘는 리치몬드 과자점을 운영하려면 이른바 ‘유행하는’ 빵을 만들어야 하는 현실도 그를 괴롭힌다.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애증이라는 건, 결국 사랑한다는 말이다. 인간으로서. 권 팀장이 “아버지는 테제도, 그렇다고 안티테제도 아니었다”는 김소진 소설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 나온 문장을 읽었는지 모르지만, 그는 정확히 김소진과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고나무 기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ESC 많이 보는 기사

70년간 갈비 구우며 신화가 된 요리사, 명복을 빕니다 1.

70년간 갈비 구우며 신화가 된 요리사, 명복을 빕니다

만찢남 “식당 창업? 지금은 하지 마세요, 그래도 하고 싶다면…” 2.

만찢남 “식당 창업? 지금은 하지 마세요, 그래도 하고 싶다면…”

내가 만들고 색칠한 피규어로 ‘손맛’ 나는 게임을 3.

내가 만들고 색칠한 피규어로 ‘손맛’ 나는 게임을

히말라야 트레킹, 일주일 휴가로 가능…코스 딱 알려드림 [ESC] 4.

히말라야 트레킹, 일주일 휴가로 가능…코스 딱 알려드림 [ESC]

새벽 안개 헤치며 달리다간 ‘몸 상할라’ 5.

새벽 안개 헤치며 달리다간 ‘몸 상할라’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