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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선문답의 탈출구

등록 2009-05-13 19:50수정 2009-05-13 19:51

‘적당히’ 선문답의 탈출구 / 롯데호텔 서울 정문환 조리장의 노트
‘적당히’ 선문답의 탈출구 / 롯데호텔 서울 정문환 조리장의 노트
[매거진 esc] 너는 내운명




롯데호텔 서울 정문환 조리장의 노트

이번엔 노트가 ‘내 운명’이다. 한 요리사의 30년 전, 20년 전, 10년 전 노트는 ‘한식 조리법의 진화’를 보여준다.

“된장찌개 : 육수는 멸치국물로 사용하면 좋다. 된장은 체에 밭쳐서 사용한다. 야채로는 호박, 파, 두부, 달래, 양파, 양송이, 풋고추를 넣고 끓인다. 소금으로 간을 한다. 모시조개 해감한 것을 사용할 것. 고춧가루는 약간 넣는다.”(30여년 전 노트)

“삼계탕 : 20마리 기준. 닭뼈 6마리. 양파 1EA 1/2, 감초 3EA(20g) 황 7~10뿌리(40g) 계피 30g, 통후추(20알 10g) 찹쌀 1스푼(100g 불린 것), 노각 5EA(20g) 등을 모두 넣고 물을 붓고 육수를 만든다. 그런 다음에 건더기를 모두 건져낸다. 그리고 삼계탕 닭이다. 밤 1, 대추 1, 은행 2EA, 마늘 1, 수삼 1쪽, 불린 찹쌀 2스푼반 정도 넣고 푹 익힌다.”(20여년 전 노트. ‘EA’는 이치(each)다.)

“자연송이 돌솥볶음밥 소스 1. 간장 200g 2. 물 140g 3. 미림 140g 4. 설탕 80g 5. 정종 120g”(10여년 전 노트)

기자로 활약했던 작가 조지 오웰은 좋은 문장을 쓰는 요령 가운데 하나로 “짧은 단어로 충분할 때 긴 단어를 절대 쓰지 말 것, 단어를 칠 수 있을 땐 언제든지 짧게 칠 것”을 주문했다. 헤밍웨이도 비슷한 충고를 했다. 좋은 문장이란 덧붙일 게 없는 상태가 아니라 뺄 게 없는 상태라는, 이 문장의 금욕주의자들과 롯데호텔 서울 한식당 무궁화의 정문환(46) 조리장의 노트는 닮았다. 말은 줄고 핵심만 남았다. “그 당시는 한식이 체계화되기 전입니다. (레시피를) 주방장 앞에서 적을 수 없잖아요. 화장실에 가서 적고…. 그래서 노트 속 데이터는 다 정리해서 유에스비에 있는데 노트는 못 없애요. 이거를 보면 나를 일깨워 줘.”

음식이 유명한 곳도 아닌 양평이 그의 고향이며 부모는 농사를 지었는데 어린 시절의 정문환 소년은 미용, 요리, 춤에 관심이 있었다니 환경과 무관한 ‘끼’란 실재하는 것 같다. 취사병으로 차출돼 강원도 양구에서 군생활을 한 것도 도움이 됐다.


롯데호텔 서울 정문환 조리장
롯데호텔 서울 정문환 조리장
제대 뒤 본격적으로 한식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교육은 도제식이었다. “소금을 적당히 넣고” “간은 적당히 맞추라”는 선문답이 오고 갔다. 30여년 전 노트에 조리법이 문장으로 적힌 이유가 여기 있다. 수습 시절의 정문환 조리장은 선배의 말을 그대로 받아 적었다. 직접 해보지 않고 조리법을 숙달할 방법이 없었다. “가령 갈비구이를 배웠다면 직접 해보는 거죠. 근데 당시 단체 생활에서는 튀면 찍히잖아. 뭘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를 정도로 얌전하게 해야지. 만약 내가 아침 8시 조라면 6시에 나와서 갈비구이를 한번 만들어본 뒤 싹 정리한 다음 숙소로 돌아가 다시 7시30분에 출근하는 척 같이 올라왔지.”

“<한겨레> 선배 기자의 21년 전 취재 수첩을 보는 것처럼 감동적”이라고 말했더니 웃는다. 인터뷰 초반에 “언론 인터뷰는 나를 부풀리는 것 같아 싫다”고 했지만 달변이었다. “외국인들이 많이 접촉하는 특급호텔 대부분에 한식당이 없는데 한식 세계화가 가능하겠느냐”고 덤덤하고 직설적으로 말하는 그의 태도는 좋은 의미에서 스트레이트 부서 기자 같다.

글 고나무 기자· 사진 제공 롯데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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