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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월이면 장수한 셈

등록 2009-06-03 19:37수정 2009-06-03 19:38

임피리얼 팰리스 호텔 중식당 ‘천산’의 왕덕리 주방장
임피리얼 팰리스 호텔 중식당 ‘천산’의 왕덕리 주방장
[매거진 esc] 너는 내운명




왕덕리 주방장의 차오

요리사들의 인생사를 들을 때마다 시인 고은을 흉내내 요리사 버전의 <만인보>를 쓰고 싶어진다. 임피리얼 팰리스 호텔 중식당 ‘천산’의 왕덕리 주방장도 같은 느낌을 줬다. 왕 주방장의 요리 인생을 책에 비유한다면, 맨 앞자리에 핵심 단어 몇 개로 된 목차를 만들 수 있다.

닭 l 그는 57년 닭띠다. 산둥성 출신 아버지는 삼형제를 낳았다. 일제 때부터 화교들이 모여 살던 서울 종로구 관수동에서 나고 자랐다. 자유당 치하 1957년은 한국인에게 전쟁 뒤 평화시기지만, 왕 주방장의 가족에게는 어두운 시기였다. 53년에 100원을 1환으로 바꾼 통화 개혁이 있었다. 은행 거래보다 현금 보유를 좋아한 화교들이 타격을 입었다. 중국음식점에 높은 세율을 적용하고 음식값을 통제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가 한국 정부의 이런 차별 정책 탓인지 모르지만,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왕 주방장은 열네 살 때부터 요리를 했다. “화교들은 어쩔 수 없어서 요리사가 된 측면이 있다”고 그는 덤덤하게 말했다. 닭띠인 왕 주방장에게 닭은 시험 문제였다. 처음 일했던 중식당은 서울 시청 근처에 있던 금문도다. 막내 시절 왕 주방장을 괴롭혔던 메뉴는 ‘기용’을 사용한 요리였다. 닭고기(기)를 아주 곱게 다져 달걀흰자를 섞은 식재료를 말한다. 기용을 다른 식재료와 함께 기름에 튀기는데, 접시에 담을 때는 기름을 최대한 빼야 했다.


불 l 70년대 초반 당시 중국음식점에서는 연탄불을 땠다. 중식은 특히 불이 세다. 300도 넘는 강한 화력이 필요하다. 금문도 주방에서는 허리까지 오는 연탄 화덕에서 스무 장씩 연탄을 땠다. 새벽에 출근한 막내 왕덕리 소년의 첫 임무는 전날 탄 연탄재를 끄집어내고 다시 연탄을 쌓는 일이었다. 연탄불은 쉽게 끄고 붙일 수 없어 내내 켜놓아야 했다. 주문이 적은 오전에는 통풍구를 최대한 닫아 불을 약하게 유지했다. 주문이 몰리는 점심때 불을 키워야 했다. 오전 내내 탄 연탄은 서로 들러붙었다. 들러붙은 연탄은 통풍구를 열어도 화력이 약하다. 연탄 화덕 위로 손을 뻗어 긴 쇠꼬챙이로 쑤셔 들러붙은 연탄을 떼는 것도 왕덕리 주방장의 일이었다. 손에 화상이 지워질 날이 없는 건 그 때문이었다.

왕덕리 주방장의 차오
왕덕리 주방장의 차오
차오 l 중식 요리사들이 사용하는 밑이 둥근 프라이팬이다. ‘볶다’는 뜻의 ‘초’(炒)자를 쓴다. 직접 들어보니 1㎏도 넘는 것 같다. 왕 주방장의 손이 차오만한 게 이해된다. ‘천산’에서는 석 달 쓰면 차오를 버린다. 석 달 동안 강한 불에 요리를 하면 금속으로 된 차오가 쭈그러지고 갈라진다. “얼마나 요리를 많이 하면 석 달 만에 버리냐”고 놀라 물었더니, 손님 많은 홍콩 식당에서는 일주일 만에 쓰고 버리기도 한다고 덤덤하게 답한다. 이 차오를 가지고 단품 요리도 만들고 홍소 샥스핀찜, 모둠해물 등 8코스로 구성된 중식 메뉴(5만5000원)도 만든다. 만도칼처럼 사각으로 생긴 ‘차이다오’(菜刀)도 중식당에서만 볼 수 있는 도구다. 채소를 써는 차이다오와 그 외의 재료를 써는 차이다오로 나뉜다.

‘시대의 칼’도 왕 주방장의 대만 국적을 끊지는 못했다. 두 자녀도 모두 화교다. 사람을 지지고 볶는 서울이라는 차오 안에서, 왕 주방장은 인생의 화상을 견디며 두 아이를 사랑하며 살았다.

글 고나무 기자·사진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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