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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깎으며 ‘던커크 스피릿!’

등록 2009-04-08 20:51수정 2009-04-08 20:52

W호텔 총주방장 키아란 히키
W호텔 총주방장 키아란 히키
[매거진 esc] 너는 내운명




W호텔 총주방장 키아란 히키의 수건

키아란 히키 W서울워커힐 총주방장의 말을 듣다 무릎을 쳤다. 기시감에서다. 히키 주방장은 초짜 요리사이던 1985년 아일랜드 더블린의 한 레스토랑에서 하루 열다섯 시간씩 일한 뒤 새벽 2시 일이 끝나면 땀에 전 요리사복을 걸친 채 펍으로 달려가 마지막 주문을 받는 종이 울릴 때까지 술을 펐다.

1930년대 파리의 한 삼류 레스토랑에서 접시닦이로 일했던 조지 오웰은 이렇게 썼다. “마치 터키탕 같은 주방의 열기 속에서 마신 모든 술을 땀으로 빼낼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접시닦이들은 이를 알고 계산했다. 몇 쿼트(1쿼트는 약 1.14ℓ)의 와인을 들이켠 효과, 그리고 그 직후 술이 해를 끼치기 전에 땀으로 배출하는 것이 접시닦이의 삶이 가진 보상 작용들 중의 하나다.”(<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30년대 파리 레스토랑이나 50여년 뒤 아일랜드의 레스토랑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금 한국의 주방이라고 크게 다를까?

그는 베인 상처보다 덴 상처가 훨씬 큰 문제라며 말을 이었다. 베인 상처는 그저 천으로 말고 일하면 되지만 덴 상처는 하루종일 아팠다. “83년 아일랜드의 슬리고(Sligo)에서 처음 일했던 레스토랑에서 오븐이 허리 밑에 있기 때문에 프라이팬을 넣고 빼면서 팔꿈치 안쪽이 오븐 입구에 닿아 흉터가 생겼다. 마치 군대 계급장(아미 스트라이프)처럼.”

히키 주방장의 수건.
히키 주방장의 수건.
그래서 히키 주방장은 자신의 운명을 상징하는 사물로 ‘수건(사이드 타월)’을 들고 왔다. 그는 음식도 냄비도 뜨거운 주방에서 수건 없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모든 요리사는 자기 수건을 숨겨 놨다. 세탁부가 빨고 나서 갖다줄 때 모자랄 적이 많았다. 어떤 요리사는 수건을 냉장고 감자 밑에 쑤셔 넣어 숨겼다. 히키도 ‘수건 보물찾기’를 하며 청춘을 보냈다.

91년 걸프전 때 최악을 경험했다. 경제 사정이 나빠져 특급호텔 포시즌 주방에서도 8명 몫의 일을 4명이 나눠 했다. 히키 주방장은 매일 총매니저가 “던커크 스피릿!”을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감자를 깎았다. 던커크는 프랑스 노르망디의 됭케르크로, 2차대전 초 영국군은 고생 끝에 독일군의 추격을 피해 됭케르크에서 본토로 피했다. “던커크 스피릿!”은 그러므로 우리 말로 “하면 된다!”쯤 된다.

그는 가끔 어린 시절을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1965년 열남매 중 하나로 태어났다. 고교 시절 근처 호텔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요리를 접했다. 당시 아일랜드에서 연어를 낚시해 팔려면 면허가 필요했다. 돈이 궁한 이웃들이 몰래 잡은 연어를 가져오면 단속반이 뜨기 전에 다듬어 냉장고에 넣는 게 소년 히키의 일이었다. 그는 지금 여러 지역 포시즌에서 경력을 쌓은 특급 요리사다. 89년 “이 짓을 때려치우겠다”고 지배인에게 말했던 건 추억으로 남았다. 지금은 W서울워커힐(02-2022-0111)에서 오는 22일 진행할 두 번째 W구어메이 준비에 한창이다. ‘올드 vs 뉴’라는 콘셉트로 구대륙과 신대륙 포도주를 각 코스 메뉴에 맞춰 음미한다. “아일랜드인은 말을 잘한다”고 하자 “아일랜드인들은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다”고 답하며 웃는다.


글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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