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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esc를 누르며
오래전 ‘딴지일보’에서 배꼽을 잡으며 본 기획기사가 있습니다. ‘직접 떠나지 않고도 외국여행 다녀왔다고 속일 수 있는 사진찍기’에 대한 정보 기사였습니다. 그래서 국내에서 찾을 수 있는 자유의 여신상, 에펠탑, 백악관 지붕, 그리스 신전 기둥, 동남아 리조트 인테리어 등을 소개했습니다. 예상할 수 있듯이 대부분 모텔이나 예식장, 가끔은 나이트클럽 같은 곳이었죠.
외국여행 또는 외국에 대한 선망이 가장 우스꽝스럽게 드러난 게 바로 이런 조형물일 겁니다. 도심 속에 차지한 이런 건물들은 때로 큰 웃음을 주지만 때로 ‘쪽팔림’을 제공합니다. 문화적 빈곤함을 만방에 과시하는 듯해서이죠. 이 기획도 그런 의도로 나온 것이겠죠.
도시의 풍경을 좌우하는 건 모뉴먼트가 될 만한 조형물이나 대형 건물들보다 공중전화부스나 버스정류장, 가판 매점, 벤치 같은 스트리트 퍼니처일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스트리트 퍼니처는 우리에게 오랫동안 공기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출퇴근길 하루에도 몇번씩 버스정류장으로 가지만 이곳이 좀더 근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오히려 광화문 같은 곳에 남다르게 지어진 버스정류장을 보고서야 ‘아 정류장이 이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뒤늦게 깨닫는 경우가 더 많을 듯합니다.
서울시와 지자체에서 버스정류장을 바꾸기 위해 다양한 공공 디자인 프로젝트를 가동한다고 하죠. 5면에 등장하는 새로운 디자인의 버스정류장을 보면 찾아가서 한번 앉아보고 싶다는 생각도 듭니다. 요즘은 외국여행을 가도 에펠탑 같은 뻔한 사진이 아니라 ‘무심한 듯 시크한’ 벤치나 우체통 따위를 찍어와 블로그에 올리는 사람이 많듯 내가 매일 서 있는 정류장을 누가 카메라에 담는다면 뿌듯할 거 같습니다. 다만, 우리 주변의 ‘아티스틱’한 건물들 상당수가 그렇듯 주변 분위기와 무관하게 ‘나 잘났다’를 외치는 ‘세련된 촌티’를 내는 정류장이 들어서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기사 속 정기용 건축가가 무주에 만든 정류장처럼 ‘은근히 세련된’ 정류장들을 기대해봅니다.
김은형 〈esc〉팀장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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