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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 태풍에 쓰러진 날

등록 2009-03-25 21:41

맥주 태풍에 쓰러진 날
맥주 태풍에 쓰러진 날
[매거진 esc] 너는 내운명
오진영 브루마스터의 ‘키’

오진영(33) 브루마스터의 바지 뒷주머니에는 ‘키’가 꽂혀 있다. 맥주를 만드는 탱크의 연결 밸브를 조이고 열 때 쓰는 도구다. 조그만 멍키 스패너처럼 생겼는데, 브루마스터들은 열쇠처럼 생겼다고 해서 키(key)라고 부른다. 오진영 브루마스터는 출근하자마자 키부터 집어든다.

맥주를 담그는 과정은 요리에 비유할 수 있다. 식재료(맥아)를 가지고 열을 가하고(로스팅), 간을 맞추고(홉을 넣어 쌉쌀한 맛을 더한다) 발효시킨다. 발효 과정을 거친다는 점에서 김치와 비교할 수 있을까? 다만, 완성 때까지 수십 일이 걸리는 힘든 요리다. 코엑스 1층에 있는 서울 웨스틴조선호텔 오킴스브로이하우스가 그의 주방이다.

높이가 2m 넘는 발효 탱크와 숙성용 탱크는 관으로 이어져 있다. 그 관의 중간에 밸브가 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탱크와 탱크의 연결을 끊을 수 있게 하는 장치다. 만약의 사태란 워트(숙성 전 막 발효되기 시작한 맥아즙)가 미생물에 오염되는 사고 등을 말한다. 오염된 맥주는 본연의 고소하고 쌉쌀한 맛 대신, 시금털털한 맛을 낸다.

맥주를 사랑한 식품공학도는 2002년 오킴스를 직장으로 택했다. 그는 곧바로 양조 과정에 빠졌다. 인간이 미생물을 제어하는 맥주 양조 과정은 과학이자 예술이었다. ‘사수’는 독일인 브루마스터 킬리안 요아힘. 직장에서 휴대전화를 꺼내기만 해도 차갑게 쏘아보던 일벌레였다. 영화에 묘사된 전형적인 독일인, 딱 그런 인상이었다.

오진영 브루마스터
오진영 브루마스터
그해 여름 아침 오진영 브루마스터가 키를 잘못 놀려 맥주를 뒤집어쓴 건 그날따라 유난히 과묵했던 요아힘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 맥주 발효 탱크 안의 압력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약 2.4바(bar)에 이른다. 날씨 관련해 기압을 나타내는 단위로 바는 너무 커서 1000분의 1인 헥토파스칼을 쓴다. 지난해 한국에 왔던 태풍 7호의 중심기압이 985헥토파스칼, 즉 1바가 채 안된 수준이었다.

효모의 증식 작용으로 부글부글 끓는 워트는 태풍 7호보다 센 힘으로 탱크 벽을 압박하고 있었다. 조심스레 밸브를 닫아야 했다. 10년 된 친구의 이름을 갑자기 까먹는 것처럼, 밸브의 열고 닫는 방향을 헷갈린 오진영 브루마스터는 닫아야 할 밸브를 열어버렸다. 그로부터 5분 동안 양조장에는 태풍이 불었다. 밸브 틈새로 워트 상태를 막 지난 ‘어린’ 맥주가 뿜어져 나왔다.


물대포를 맞은 사람처럼 그는 눈을 뜨지 못했다. 밸브를 잠그려 키를 움직였지만 볼 수 없었다. 두 손을 더듬거려 겨우 밸브를 잠그기까지 5분이 걸렸다. 그새 100ℓ의 맥주가 사라졌다. 오진영 브루마스터가 가장 먼저 쳐다본 것은 요아힘이었다. 함께 맥주를 뒤집어쓴 독일인은 의외로 빙긋 웃으며 “같은 실수는 두 번 하지 말라”고 말했다. 오진영 브루마스터는 같은 실수를 두 번 하지 않았다.

글 고나무 기자·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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