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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칼 가방

등록 2009-03-11 21:10수정 2009-03-11 21:11

그 남자의 칼 가방
그 남자의 칼 가방
[매거진 esc] 너는 내운명
기자의 펜은 종종 칼로 비유된다. 검사를 흉내내 ‘거악을 척결한다’는 말을 쓰던 선배 기자도 있었다. 그러나 어떤 거악도 사람 모습을 하고 있다. 내 눈앞의 누군가를 기사로 ‘베는’ 것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무능한 기자라 그런 경험이 적었지만, 그때마다 마음이 불편했다.

‘나는’ 대신 ‘기자는’이라는 주어를 쓰는 3인칭 시점의 기사체는 그 칼을 휘두르게 해 주는 방패였다. 가끔 그 객관성의 방패는 구보하는 병사가 쓴 방독면처럼 나를 숨차게 만들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필요한 게 곧 옳은 것은 아니다”라는 조지 오웰의 말에 동의하기 시작한 것은. 누군가를 베는 대신 내가 쓴 자음과 모음이 아이를 배부르게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가끔 생각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다.

김신(37)(사진) 요리사를 부러워한 이유가 여기 있다. 요리사의 칼은 피 흘리게 하는 대신 배부르게 한다. 5일 만난 김신 요리사는 자신의 운명을 상징하는 도구로 칼을 꺼내 왔다. “요리를 하다 보면 여러 가지 도구를 사게 되죠. 하지만, 그중에서 몸의 일부처럼 항상 지참하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선반 위에 놓고 고이 모셔 두는 것도 있습니다.”

그가 옅은 갈색의 색이 바랜 나무가방을 열자 프랑스 사바티에 나이프(Sabatier knife) 3종 세트의 스테인리스 칼날이 빛났다. 초록색 코끼리 모양의 상아 손잡이가 달려 있다. 손잡이에 예전 소유자의 이니셜이 음각 돼 있다. 김신 요리사의 미국 시절 이름인 션 김의 에스·케이(S·K)가 아니라 엠·피(M·P)다.

김신 요리사
김신 요리사
마이클 피에리니는 2004년 제자인 김신 요리사가 한국으로 돌아갈 때 자신의 칼을 기념으로 건넸다. 엘에이의 한 대학 요리학과 교수였던 피에리니는 2000년 자기 밑에 온 마른 동양인 학생을 따뜻이 받아줬다. 문화가 달랐지만 피에리니 교수는 누군가와 심리적 거리를 두면서도 동시에 그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칼은 요리사의 욕망이다. 마초문화가 팽배한 주방에서 칼은 애인으로 비유된다. 요리사들은 ‘네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는 계명을 종종 어겼다. 김신 요리사는 십여년의 요리사 생활 중 세 차례 칼을 도둑맞았다. 2002년 특급호텔 포시즌 주방에서 도난당한 칼은 미국에 오기 전 일본 긴자에서 산 명인의 칼이었다. 5년 동안 쓰던‘수족’을 도난당한 뒤 김신 요리사는 엘에이에서 120달러를 주고 혼야키로 만들어진 일본 칼을 샀다. 혼야키(本燒)는 담금질할 때 기름이 아닌 물로 급속냉각해 칼 면이 팽팽하고 갈아도 형태가 망가지지 않는다. 손이 많이 가는 명품이다. 그는 2002년부터 칼을 주방에 두지 않고 칼가방에 넣고 다닌다.

“피에리니 교수가 준 칼을 쓸 날이 오겠죠?” 그는 아직 그 칼을 한 번도 쓰지 않았다. 지금 그가 레스토랑 올리브 앤 팬트리(02-549-4698)에서 쓰는 칼은 혼야키칼이다. “정말로 중요한 그 누군가가 나타나거나 스승 피에리니가 한국에 온다면 그 칼로 요리를 할 겁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라면에 넣을 파를 썰기 위해 처음 칼을 잡은 소년은 지금 주방에 서 있다. 그의 음식을 먹고 사람들은 배부르다. 웃는다.

글 고나무 기자·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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