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를 누르며
[매거진 esc] esc를 누르며
‘틀면 나오는’ <연애불변의 법칙>을 종종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에 잠깁니다. 막장 리얼리티쇼에 무슨 고민이!라고 생각하실 분도 있겠지만 ‘막장’은 뒤집어 보면 지금 세태와 쾌락의 끝을 보여주는 ‘전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선 제가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억울함입니다. 구별하자면 가해자 편입니다. 수많은 청춘들이 연애를 하지만 유치원 때부터 꿈꾸던 왕자님과 공주님을 만나 연애하는 사람, 흔치 않습니다. 우연히 스친 인연 또는 절묘한 타이밍의 사건으로 엮여 만난 사람과 알콩달콩 사랑을 하고 다툼도 벌입니다. 그렇게 연애를 하다가 그야말로 완벽한 남자나 여자가 저에게 다가와 한눈에 반했다고 들이댄다면 흔들리지 않을 사람 얼마나 있을까 싶습니다. 게다가 평생을 약속한 기혼자가 아니라면 단지 여친/남친을 배신했다고 죽일 놈 소리 듣는 거 좀 억울하다고 생각합니다.
두번째, 결론을 보면서 찜찜할 때가 많습니다. 제목처럼 커플 깨놓자는 게 프로그램의 목적이어야 할 이유는 없지만 ‘커플 스티칭’도 아닌데 파트너에게 무심하기 짝이 없던 남친이 처음 만난 여자한테 사랑한다고 목 놓아 외치거나 백은하씨가 꼽은 최악의 순간(7면 참조)처럼 작업녀에게 ‘2주 안에 정리하겠다’고 못박았던 애인을 쉽사리 용서해 주는 사람들을 보면 속이 탑니다. 진행자 김현숙씨처럼 “내가 동생 같아서 하는 이야기인데 당장 때려치워”라고 쫓아가서 말해주고 싶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제가 가장 놀랐던 건 바로 문제의 ‘작업녀’였습니다.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티브이에 나와서 “우리 사귀어요” 말하는 커플을 보면서 ‘헤어지면 어쩌려고 저런 경거망동을!’ 흥분했는데, ‘장난이야’라며 진한 스킨십을 하는 모습을 보면 당황스럽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지적하는 사람은 거의 없군요. 진짜 세상이 변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무도 놀라지 않는 모습에 혼자 당황하면서 화들짝 놀랍니다. ‘무심한 듯 시크한’ 척했던 저, 늙은 거 맞나 봅니다.
김은형 〈esc〉 팀장 dmsgud@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