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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esc를 누르며
해외 출장이나 휴가를 가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Do not disturb’라고 적혀 있는 문패를 바깥 문고리에 걸어놓는 겁니다. 방에서 사제폭탄 만드는 007도 아니고 방해받으면 안 될 중요한 일이 뭐 있겠습니까마는 나름 이유가 있긴 합니다. 우선 방이 너무 지저분해서입니다. 구김을 막기 위해 가방에서 꺼내 침대와 탁자에 줄줄이 널어놓은 옷들과 외출에서 돌아온 뒤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신발짝, 여기저기 바닥을 굴러다니는 쇼핑백들이 아수라장입니다. 사실상 청소가 불가능합니다.
게을러서 그런 탓도 있지만 저에게 있어 방 어지럽히기는 탈출과 해방이라는 여행 목적의 하위 카테고리 중 하나입니다. 상큼하고 깔끔하게 정리된 방은 처음 들어가는 순간 한번 즐기는 걸로 족합니다. 두번째는 팁 때문이기도 합니다. 고작 몇 달러인 비용 때문이라기보다 탁자에 놔야 할지, 침대에 놔야 할지, 침대라면 발치에 놔야 할지 베개 밑에 놔야 할지 영 신경이 쓰입니다. 특히 익숙지 않은 팁문화 때문에 몇 번 팁을 두는 걸 까먹고 나오는 바람에 자책을 하다가 속 편하게 청소를 포기하자, 된 거죠.
이런 저의 습관이 뜻밖의 괜찮은 여행법이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번주 여행면에서 휴양지 여행 도움말을 보면 물이 귀한 동네 여행에서는 침대 시트 등 빨래 줄이기도 현지인들을 덜 ‘Do not disturb’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자연과 쾌적한 숙소, 다양한 놀거리 가득한 휴양지는 노래 가사처럼 ‘올모스트 패러다이스’입니다. 적지 않은 돈을 주고 도착한 판타지 월드, 그 안에서는 구준표나 패리스 힐튼이 부럽지 않은 세상에서 그 세상 밖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꼭 정치적으로 올바르기 위해서라기보다 천편일률적인 패키지식 여행을 벗어나 좀더 세련된 여행을 즐기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누구나 다 가는 여행지, 누구나 즐기는 방식이 촌스럽다고 느낀다면 남종영 기자의 기사를 읽어보시길. 누군가의 말대로 세상도 여행도 아는 만큼 더 보입니다.
김은형 〈esc〉 팀장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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