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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esc를 누르며
“왕건이 건졌어요, 왕건이!”
헌책방 취재를 다니며 ‘책만 보면 지갑이 저절로 열리는 병’이 도져 괴로워하던 남종영 기자가 좀처럼 커지지 않는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회심의 미소를 쓱 지으며 보여준 책은 모서리가 누렇게 바랜 김연수씨의 소설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였습니다. 1994년에 나온 이 책은 이제는 없어진 <작가세계> 문학상 수상작으로 김씨의 첫 작품입니다.
표지를 펼쳐 보면서 기자들은 모두 “와~” 감탄을 했습니다. 〈esc〉에 칼럼이 연재될 때 줄곧 보았던 김씨의 얼굴과는 전혀 다른 ‘소년’ 김연수가 동그란 안경을 쓰고 수줍게 웃는 모습이 책날개에 실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작품을 발표할 때 김씨는 20대 초반이었지만 고등학생이라고 말해도 끄덕일 만한 앳된 얼굴에서 ‘처녀작’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 단어의 정치적인 어감을 떠나서 말이죠.
남 기자가 건진 ‘왕건이’야말로 헌책방 탐험이 설레고 스릴 넘치는 이유입니다. 처음 발표된 지 10년이 넘은 책이 대부분 그렇듯 이 책도 현재 절판 상태입니다. 시중에서 더 이상 구할 수 없는 책을 빼곡히 쌓인 책더미 사이에서 발견할 때의 기쁨.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만약 이 소설이 스테디셀러가 돼 지금까지 출간되더라도 ‘94년스러운’ 표지는 2009년도풍으로, 작가의 어색한 듯 풋풋한 얼굴은 중견 작가의 여유 있는 미소로 바뀌어 있겠죠. 헌책을 사는 건 이처럼 내용물뿐 아니라 그 내용물이 처음 나왔던 세상의 일부를, 이제는 어렴풋해진 그 시간들을 함께 손에 넣는 것이겠죠.
요새는 헌책방도 세련된 문화공간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헌책방에서 향 좋은 커피를 마시고 공연을 보는 것도 좋지만 너무 깔끔하거나 편리해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촌스러운 마음도 조금은 있습니다. 오래된 책 냄새를 맡으며 한참 동안 눈으로 책 목록을 더듬다가 ‘왕건이’를 발견하는 재미도 포기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김은형 〈esc〉 팀장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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