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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esc를 누르며
월·화요일이면 마음이 급해집니다. 마감을 서두르기도 하고 안 되면 사무실에서 티브이를 켭니다. 다 <꽃보다 남자> 때문이죠.
요즘 난리입니다. 〈esc〉에서만도 지지난주 ‘연예가 공인중계소’, 지난주 ‘하니누리 놀이터’ 만화 퀴즈에 이어 이번주 ‘너 어제 그거 봤어’와 ‘송은이네 만화가게’까지 <꽃남>이 쉼없이 등장하는군요.
사실 <꽃남>은 잘 만든 드라마가 아닙니다. 아니 완성도를 가지고 논하는 것 자체가 얼굴이 확확 달아오르는 일이죠. 암흑세계까지 평정한 부동산 재벌의 상속자라거나 독립운동가 출신의 대형 박물관장 자손이라는 모순적 조합도 모자라 세계적 주목을 받는 젊은 도예가인 ‘고등학생’이 더해지니 이 정도 배경이면 ‘와~’ 하는 찬탄이 아니라 ‘푸하하’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죠. 게다가 이 엄동설한에 꼭 밖으로 뛰쳐나와 바이올린을 켜는 아름다운 소년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비현실성의 경중을 따지면 운명이 뒤바뀌고 사돈의 팔촌과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는 이른바 ‘막장’ 드라마보다 떨어지지 않지만 그래도 ‘꽃남’이 즐거운 건 ‘피고름’ 운운하는 이 악문 대사들을 들을 필요 없고 혈압 높이고 욕하면서 볼 필요 없기 때문이죠. 게다가 보는 것만으로 훈훈해지는 말 그대로의 ‘꽃남’들이 자체발광을 하니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즐겨볼밖에요. 그래서 10대뿐 아니라 실제로 시청률을 움직이는 30~40대까지 이 드라마를 좋아하는 건 최근 빅뱅이나 동방신기 같은 아이돌 스타에 나이 지긋한 팬심이 불타오르는 현상과 무관해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도 만화 같지만 <꽃남>이 조금 더 뻔뻔하게 만화 같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결정은 부모님이 하는 거야” 따위의 확 깨는 나름 현실적인 대사는 집어치우고 말이죠. 눈뜨면 얼굴에 수백개 빗금 쳐지는 진짜 ‘막장’ 상황을 봐야 하는 지금 일주일에 두 시간, 100프로 순수 당분의 백일몽 처방을 받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요.
김은형 〈esc〉 팀장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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