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국회 국민동의청원에 동의한 사람이 15일 국회 소관위원회 회부 기준인 10만명을 넘어섰다. 지난 달 24일 청원이 시작된 지 22일 만이다. 이에 따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 중인 차별금지법안 심사에 속도가 붙게 됐다.
국회에 차별금지법안이 처음 올라온 것은 2007년이다. 이후 14년을 표류했다. 그사이 대한민국 군인으로 남길 간절히 바랐던 트랜스젠더 군인은 강제전역 뒤 죽음을 택했다. 고용시장에선 많은 이들이 여전히 성별·학력·나이·사회적 신분·성적지향 등을 이유로 차별을 겪는다. 곳곳에서 ‘스쿨 미투’를 외치는 목소리가 터져나왔지만 성차별이 만연한 교내 환경은 변함 없다.
헌법 제11조 1항은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한다. 차별을 금지해야 하는 근거는 헌법에 있지만 무엇이 차별이고, 차별의 예방과 구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해져 있지 않다. 피해자는 자신이 당한 차별을 설명할 법적, 제도적 언어가 없다. 차별 입증 단계부터 높은 벽에 부딪힌다. 차별금지법 제정은 이 벽을 부수는 망치다. 전문가들은 “차별금지법은 존재 자체로 ‘차별을 하면 안 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사회에 준다. 피해자들에겐 차별을 설명하고 문제제기할 수 있는 명확한 근거가 생긴다”며 차별금지법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한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국민적 공감대는 이미 형성돼 있다.
지난해 6월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국민인식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 10명 중 9명(88.5%)은 한국 사회 차별에 대응하기 위해 차별 금지를 법률에 제정하는 방안에 찬성한다고 답했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나도 차별의 대상이나 소수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봤다는 응답이 91.1%에 달했다.
6월 성소수자 인권의 달, 그리고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국회 국민동의청원을 계기로 <한겨레>는 ‘차별금지법이 있는 한국 사회’를 상상해 봤다. 대표 차별 사례 세 가지를 꼽아
지난해 6월 장혜영 정의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차별금지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면 이 사건들이 어떻게 전개됐을지 전문가 자문을 받아 살펴봤다.
장 의원이 낸 차별금지법안은 지난해 9월 소관 상임위원회인 법제사법위원회에 상정됐다. 역대 네 번째 법사위 상정이다.
동아제약 성차별 면접
ㄱ씨는 지난해 11월 동아제약 신입사원 면접 자리에서 성차별 질문을 받았다. 인사팀장이 면접자 중 유일한 여성이었던 ㄱ씨에게 “여성이라 군대에 가지 않았으니 남성보다 임금을 적게 받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은 것이다. 이런 질문을 들은 면접자는 ㄱ씨만이 아니었다. 기업정보플랫폼 잡플래닛에는 동아제약이 면접에서 여성 지원자에게 ‘군대에 갈 생각이 있냐’ ‘여자는 결혼을 하면 그만둬서 안 된다’ 등의 발언을 했다는 면접 후기가 이어졌다. ㄱ씨는 동아제약이 고용상 성차별 행위를 했다고 보고 지난 3월 고용노동부에 민원을 넣었다.
전문가들은 대체로 면접 과정에서의 차별적 발언만으로는 현행법상 처벌이 어려울 거라 본다.동아제약 면접 중 성차별 질문은 장혜영 정의당 의원이 발의한 차별금지법안 제10조(모집·채용상의 차별금지) 3호 위반에 해당한다. 이 조항은 ‘서류지원 및 면접 시 직무와 관련 없는 성별 등의 정보를 제시 요구하거나 채용 시 성별 등을 평가 기준으로 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한다.
기존 남녀고용평등법 규정은 통상 채용공고에서의 성차별을 처벌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 사건을 맡은 김두나 직장갑질119 변호사는 “동아제약 사례가 남녀고용평등법에서 정의하고 있는 차별에 해당하는지 입증하기 애매한 부분이 있다. 이전 선례도 없고 확대 해석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차별금지법이 있다면 피해자들이 문제제기하고 구제를 받으려 할 때 훨씬 더 명확한 근거가 생긴다”고 말했다.
차별금지법안은 모집 공고에서부터 서류지원, 면접, 최종채용 단계까지 모든 과정에서의 차별을 금지한다. △성별 등을 이유로 모집·채용 기회를 주지 않거나 제한하는 행위 △모집·채용 광고 시 성별 등을 이유로 한 배제나 제한을 표현하는 행위 △서류지원 및 면접 시 직무와 관련 없는 성별 등의 정보를 제시 요구하거나 채용 시 성별 등을 평가 기준으로 하는 행위 △채용 이전에 응모자로 하여금 건강진단을 받게 하거나 건강진단 자료 제출을 요구하는 행위 △성별 등을 기준으로 채용인원수를 구분하는 행위 등을 금지한다. 남녀고용평등법보다 규정을 훨씬 더 구체적으로 적고 있어 응시자들을 보다 두텁게 보호할 수 있다.
홍성수 교수는 “차별금지법은 문제제기를 하려는 사람에게 힘을 실어주는 법이다. 차별금지법이 있으면 이게 왜 차별인지 설명하기가 쉬워진다. 피해자가 정확하고 손쉽게 문제제기를 할 수 있고, 구제받을 가능성도 높아진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장애인차별금지법(장차법)이 만들어진 이후 장애인 진정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사례를 들었다. 2001년부터 2007년까지 7년 간 국가인권위에 접수된 장애 차별행위 진정 건수는 598건에 불과했다. 장차법이 시행된 2008년부터 2019년까지 장애 차별행위 진정은 1만4178건에 달했다. 평균적으로 해마다 1천건 넘는 진정이 제기된 셈이다. 전체 차별사건에서 장애차별사건이 차지하는 비율은 장차법 시행 이전 14.9%에서 이후 절반이 넘는 51.5%로 대폭 늘었다.
홍 교수는 “이전에도 장애인 차별이 합법은 아니었다. 그러나 장차법이 제정되면서 국가가 장애인 차별을 간과하지 않는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줬다. 진정 건수가 확 늘어난 이유”라고 말했다. 그는 “차별금지법 제정 효과도 마찬가지다. 고용에서 차별을 겪었을 때 얼마든지 구제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 알려지면 숨어있던 차별 사례들이 곳곳에서 나올 것이다. 그러면서 사회가 한 발 짝 진전하는 것”이라고 했다.
차별금지법이 있었다면 이런 장면을 상상해 봅니다
동아제약 신입사원 면접 자리에서 성차별 질문을 받은 ㄱ씨. 면접 뒤 ‘여성이기 때문에 받은 질문’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는 차별금지법을 근거로 소송을 제기하기로 했다. 남녀고용평등법을 활용하기엔 면접에서 나온 질문만으로 채용차별을 입증하기가 까다롭고, 선례도 없기 때문이다. 차별금지법에서는
면접 과정에서의 차별을 구체적으로 명시 하고 있어 승소 가능성이 높다는 게 변호사의 판단이다.
법원의
구제조치 도 적극적으로 이뤄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ㄱ씨는 무엇보다도 동아제약이 명확히 차별을 인정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세우도록 하는 것이 이번 소송의 목표다. 법원은 피해자 청구에 따라
차별적 행위의 중지, 시정을 위한 적극적 조치, 손해배상 등의 판결을 할 수 있다. ㄱ씨는 “이번 계기로 성차별적 면접이 분명한 차별행위라는 인식이 기업 사회에 자리 잡았으면 한다”고 밝혔다.
박고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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