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희수 하사의 복직과 명예회복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회원들이 3월 27일 서울시청 광장에서 ‘변희수 하사를 기억하는 트랜스젠더 가시화의 날 공동행동’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국회 국민동의청원에 동의한 사람이 15일 국회 소관위원회 회부 기준인 10만명을 넘어섰다. 지난 달 24일 청원이 시작된 지 22일 만이다. 이에 따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 중인 차별금지법안 심사에 속도가 붙게 됐다.
국회에 차별금지법안이 처음 올라온 것은 2007년이다. 이후 14년을 표류했다. 그사이 대한민국 군인으로 남길 간절히 바랐던 트랜스젠더 군인은 강제전역 뒤 죽음을 택했다. 고용시장에선 많은 이들이 여전히 성별·학력·나이·사회적 신분·성적지향 등을 이유로 차별을 겪는다. 곳곳에서 ‘스쿨 미투’를 외치는 목소리가 터져나왔지만 성차별이 만연한 교내 환경은 변함 없다.
헌법 제11조 1항은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한다. 차별을 금지해야 하는 근거는 헌법에 있지만 무엇이 차별이고, 차별의 예방과 구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해져 있지 않다. 피해자는 자신이 당한 차별을 설명할 법적, 제도적 언어가 없다. 차별 입증 단계부터 높은 벽에 부딪힌다. 차별금지법 제정은 이 벽을 부수는 망치다. 전문가들은 “차별금지법은 존재 자체로 ‘차별을 하면 안 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사회에 준다. 피해자들에겐 차별을 설명하고 문제제기할 수 있는 명확한 근거가 생긴다”며 차별금지법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한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국민적 공감대는 이미 형성돼 있다.
지난해 6월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국민인식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 10명 중 9명(88.5%)은 한국 사회 차별에 대응하기 위해 차별 금지를 법률에 제정하는 방안에 찬성한다고 답했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나도 차별의 대상이나 소수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봤다는 응답이 91.1%에 달했다.
6월 성소수자 인권의 달, 그리고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국회 국민동의청원을 계기로 <한겨레>는 ‘차별금지법이 있는 한국 사회’를 상상해 봤다. 대표 차별 사례 세 가지를 꼽아
지난해 6월 장혜영 정의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차별금지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면 이 사건들이 어떻게 전개됐을지 전문가 자문을 받아 살펴봤다.
장 의원이 낸 차별금지법안은 지난해 9월 소관 상임위원회인 법제사법위원회에 상정됐다. 역대 네 번째 법사위 상정이다.
고 변희수 하사 강제전역 결정
지난해 1월22일 한 군인이 강제전역했다. 군 복무 중 성전환 수술(성확정 수술)을 했다는 이유에서다. 고 변희수 전 하사는 상관에게 보고한 뒤 2019년 11월 타이에서 성확정 수술을 했다. 그는 군인으로 남길 희망했다. 육군은 심신장애 3급 판정을 내리고, 전역심사위원회에 회부해 강제전역을 결정했다. “전역 심사위원회 개최를 연기하라”
“전역 처분을 취소하라”는 두 차례에 걸친 국가인권위원회 권고는 소용없었다. 변 전 하사는 지난 3월3일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유족은 변 전 하사가 생전 제기한 전역처분 취소 행정소송을 이어받았다. 육군 쪽은 여전히 ‘판단에 문제가 없었다’는 입장이다.
육군과 국방부의 강제전역 처분은 차별금지법안 3조(금지대상 차별 범위)에 해당한다. 법안 제2조는 차별금지 대상으로 ‘성별 정체성’을 포함한다. 이 법안에서 성별 정체성이란 자신의 성별에 관한 인식 또는 표현이다. 자신이 인지하는 성과 타인이 인지하는 성이 일치하거나 불일치하는 상황을 포함한다. 성별 정체성을 이유로 채용·배치·퇴직·해고 등 고용에 있어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분리·구별·제한·배제·거부하거나 불리하게 대우해서는 안 된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는 “현행법상으로도 차별은 금지된다. 그러나 육군은 소송에서 ‘국가인권위법이 (성별로 인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지) 성별 정체성으로 인한 차별 금지를 명시한 건 아니지 않느냐’고 주장하고 있다. 차별금지법이 있었다면 변명의 여지가 없는 사안”이라고 말했다.
차별금지법이 있다면 구제 수단도 다양해진다. 국가인권위는 현재 가지고 있는 권한인 시정권고보다 한 단계 높은 시정명령을 할 수 있게 된다. 또 시정명령을 받고도 기간 내 이행하지 않으면 이행강제금을 부과할 수 있다. 박한희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는 “이행강제금은 벌금과는 달리 명령을 따를 때까지 주기적으로 부과된다. 돈을 이용한 간접강제다. 이를 멈추려면 인권위 명령을 따르든지 인권위를 상대로 소송을 걸어야 한다. 지금보다 강제력이 생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법적 다툼을 하게 되더라도 큰 차이가 생긴다. 입증책임 주체가 달라진다. 차별금지법안은 ‘차별행위가 있었다는 사실을 피해자가 주장하면 그러한 행위가 없었다거나, 성별 등을 이유로 한 차별이 아니라거나, 정당한 사유가 있었다는 점을 상대방이 입증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지금은 변 전 하사 쪽이 차별을 입증해야 한다면, 차별금지법이 도입되면 군이 변 하사 강제전역은 정당하다는 입증책임을 져야 한다. 박한희 변호사는 “소송의 증명 구조 자체가 달라지는 것이다. 이는 법원이 적극적으로 판단할 여지를 준다”고 설명했다. 차별금지법안에는 법원의 구제조치를 규정한 조항도 있다. 박 변호사는 “법원의 구제조치도 단순히 손해배상뿐 아니라 차별 행위를 중지하라거나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라는 등 적극적으로 나올 수 있다. 지금은 근거조항이 없기 때문에 법원이 적극적인 판결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는 차별 방지를 위한 제도(차별시정기본계획) 마련 책임이 부과된다. 조혜인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는 “오래 전부터 군 복무하는 성소수자를 위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차별금지법이 있었다면 성소수자 군인 포용 대책 연구는 진작 이뤄졌을 것이다. 정부도 지금처럼 ‘입장이 없다’는 식의 무책임한 태도를 보일 순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차별금지법이 있었다면 이런 장면을 상상해 봅니다
성확정 수술을 하고 돌아온 변 하사는 군 복무를 계속 하길 희망했다. 육군은 심신장애 3급 판정을 내리고, 전역심사위원회에 회부해 강제전역을 결정했다. 변 하사는 즉각 인권위에 진정했다. 인권위는 육군의 강제전역 조치가 인권침해에 해당한다며 육군참모총장에 전역처분을 취소할 것을
명령했다. 육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인권위는 육군이 명령에 따를 때까지
이행강제금을 부과하기로 결정했다.
변 하사는 군의 결정이 명백한 차별이라는 법원의 판단을 받기 위해 소송도 제기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본인을 비롯한 모든 성소수자 군인들이 차별받지 않는 환경에서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되길 바랐기 때문이다. 차별금지법에 따라
증명책임은 군의 몫이었다. 변 하사 쪽은 법원이 차별금지법에 따라 적극적인
구제조치 판결을 내려주길 기대하고 있다. 군의 차별 행위를 멈추게 하고, 재발 방지 대책이 마련되려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변 하사는 기자회견에서 “차별금지법이라는 명확한 근거조항이 있다. 대한민국에서 성별정체성으로 인한 고용 차별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밝혔다. 정부도 변 하사의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청와대는 “차별금지법에 역행하는 육군의 판단이 우려스럽다. 정부는 차별금지법에 따라
5년마다 차별시정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국방부에도 성소수자 군인 포용 대책을 마련하라고 권고한 바 있다. 한국 사회에 더 이상 차별이 발 붙일 곳이 없도록 정부 차원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박고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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