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용 판타지물 ‘서연이 시리즈’ 등을 쓴 한예찬 작가가 아동성추행 혐의로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가운데, 그의 책을 출간해온 출판사가 서점에서 한씨의 책을 회수하기로 했다. 사진은 16일 오후 경기도 고양시의 한 도서 물류창고에 회수된 한예찬 작가의 책. 연합뉴스
안녕하세요. 기후변화팀 최우리입니다. 날씨와 환경, 에너지를 주제로 기사를 쓰고 있는데 이번에는 기후변화가 아닌 다른 이야기를 하게 됐네요.
20년 넘는 경력의 동화작가 한예찬(53)씨가 자신의 제자인 10대 어린이를 성추행한 혐의로 2018년 7월 기소됐습니다. 그 뒤에도 그는 스무 권이 넘는 책을 출간했고, 지난해 12월 1심 재판부는 그에게 징역 2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하며 법정구속했습니다.
취재는 2018년 하반기부터 시작했습니다. 100권 가까운 어린이책을 쓴 한씨가 어린이를 성추행한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격이었습니다. 그가 쓴 ‘서연이 시리즈’와 동요 ‘아기 다람쥐 또미’를 아는 부모들과 어린이들을 주변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경기 수원 광교 신청사로 이전하기 전인 저층의 수원지법 형사법정에서 한씨를 처음 마주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한씨는 변호인을 통해 자신은 무죄이고, 기사를 쓰면 신문사와 기자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고 했습니다.
서둘러 기사를 쓴다고 피해아동의 아픔이 쉽게 회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1심 판결을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재판을 통해 사실관계를 다툴 기회는 피고인의 권리이기도 했습니다. 한씨는 아이와의 친밀감을 줄곧 강조하며 무죄를 주장했습니다. 기사에는 다 적지 못했지만, 피해아동과 가족들은 한씨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공판 때마다 고통스럽게 반박 근거를 찾고 다퉈야 했습니다. 재판 과정을 취재하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그는 항소했고, 계속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1심 결과 실형이 선고됐지만 누구도 기뻐할 수 없었습니다. 한씨는 재판을 받는 중에도, 코로나19로 대면 만남이 불가능하게 된 뒤에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해왔다고 출판사를 통해 들었습니다. 게다가 선고 두 달이 지나도록 변화는 없었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기 전과 똑같이 서울 시내 대형서점과 도서관, 유튜브 등에서 그의 책과 노래를 영상물로, 악보로 쉽게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수감 생활만 마치면 그의 일상은 이전과 똑같을 것 같다는 불안감에 피해아동 가족은 매우 힘들어했습니다.
보도가 나간 뒤 변화는 시작됐습니다. 지난 15일 <한겨레>가
한씨 1심 재판 결과를 보도하자 대형서점과 출판사는 그의 책을 반품·회수한다고 밝혔고, 국립중앙도서관과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 성북구립도서관 등 주요 국가, 공공도서관에서도 열람·대출을 중단하기로 했습니다. 어린이청소년책작가연대 성평등위원회도 “책은 작가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이라며 “가해자는 작가로서 행동하지 말아야 한다”고 입장을 정리했습니다. 피해아동 가족은 계속 힘든 법정 다툼을 이어가야 하지만, 기사가 나간 뒤 피해아동이 느꼈을 고통에 공감하는 시민들의 지지와 위로를 전달받았다고 합니다.
진지한 고민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서울 성북문화재단 소속의 성북구립도서관 15곳은 17일, 소장 중인 한씨의 책 81권을 서고로 이동했다고 누리집에 공지했습니다. 보도를 본 16명의 사서가 긴급회의를 열어 “피해자가 존재하는 사건에 공공도서관은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 공감해야 한다”는 데 뜻을 모은 결과입니다. 다만 확정판결이 아니기 때문에 책을 폐기하지는 않기로 했다고 합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전문가들은 작가의 출판·표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피해아동의 인권을 보호하는 현명한 방법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출판사는 성범죄 유죄가 확정된 저자의 책을 판매할 것인지, 판매한다고 결정했다면 독자의 알권리는 어떻게 보장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도서관은 이들 저자의 책을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 열람·대출할 것인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위원장인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관련 법 개정 논의를 준비하겠다고 밝혀왔습니다. <한겨레>는 한씨의 확정판결 결과를 반드시 전하고, 이 사건이 남긴 과제를 함께 고민해나가겠습니다. 기사가 퍼지는 사실만으로 다시 한번 마음이 아팠을 피해아동과 가족뿐만 아니라 또 다른 피해자도 있습니다. 한씨와 함께 책 작업을 하거나 곡을 쓴 그림 작가와 작곡가입니다. 출판사는 한씨가 보내온 글에 어울리는 그림을 그린 수십명의 작가들에게는 한씨의 재판 결과를 미리 알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인기 동요인 ‘아기 다람쥐 또미’의 조원경 작곡가는 저작권 피해를 감내하며 가사 교체를 고려 중입니다.
최우리 기후변화팀 기자
ecowoori@hani.co.kr
※국립중앙도서관,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을 공공도서관이 아닌 국가도서관으로 수정했습니다.(2월22일 오후 5시4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