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가르쳐 온 초등학생을 성추행한 혐의로 기소돼 2년6개월간 재판을 받아온 어린이동화작가 한예찬(53)씨에게 1심에서 실형이 선고됐다. 그가 쓴 수십권의 책은 전국 어린이도서관과 온오프라인 서점에 비치돼 있다. 그가 노랫말을 쓴 동요는 유튜브 콘텐츠로 만들어져 지금도 재생된다. 가해자는 법정구속됐지만 그가 남긴 책과 노래에 피해아동과 그 가족의 고통은 계속되고 있다.
<한겨레>는 이 사건 1심 재판이 시작된 2018년 하반기부터 취재를 해왔다. 일부 공판은 직접 방청했지만, 사건 성격상 비공개로 공판이 진행될 때가 많았다. 이럴 때는 피해아동을 대리한 변호인을 통해 매번 공판 당시 상황을 기록했다. 피해아동 가족 요청에 따라 범행 일시, 장소, 구체적 범죄 내용 등은 밝히지 않는다. 다만 최종적으로 유죄가 확정되기 전이라도 작가 실명을 공개했다. 21차례 공판을 통해 사실관계를 살핀 1심 재판부의 유죄 판결이 있었고, 가해자가 20여년 작가로 활동하면서 어린이, 특히 여자아이가 주요 독자인 창작동화를 쓴 공인이며, 그의 책이 여전히 어린이들에게 읽히고 있기 때문이다.
20여년 동안 100여 권의 동화책과 동요 가사를 쓴 유명 동화작가 한예찬(53)씨가 지난해 12월 초 자신이 가르치던 초등학생을 성추행한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그는 구속됐지만 그의 책은 전국 서점과 도서관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게티이미지뱅크
지난해 12월3일 오후 2시 수원지법 법정동 301호. 형사15부(재판장 조휴옥) 선고 공판이 있는 날이었다. 앞서 두개의 사건 선고를 마친 재판장이 13살 미만 미성년자 위계 등 추행(성폭력처벌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어린이동화작가 한예찬(53)씨에 대한 선고를 시작했다.
흰색 셔츠와 남색 재킷을 입고 온 한씨는 법정 맨 앞줄에 앉아 재판장 선고를 들었다. 한씨는 2018년 7월 시작된 첫 재판부터 줄곧 위력에 의한 추행은 없었다고 했다. “친분관계가 있는 아동의 의사에 따라 입술 뽀뽀만 하거나 자연스럽게 안기는 등 스킨십을 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재판부 판단은 달랐다. “당시 11살이었던 피해자의 진술이 일관되고 직접 체험하지 않고서는 꾸며내기 어려운 특징적인 부분들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특히 입에 혀를 넣는 것과 단순한 뽀뽀를 명확하게 구분했고 느낌의 차이도 수사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표현했다. 무엇보다 범죄사실이 27건에 해당함에도 피해 발생 시기와 장소, 내용을 비교적 명확하게 분리해서 진술했다.”
추행 과정에 위력이 있었다는 점도 인정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논술수업, 야외체험 활동 등 교사 역할을 했던 한씨가 이러한 관계를 이용해 추행했다고 판단했다. “교사와 아동 사이의 심리적, 정서적 신뢰관계를 이용해 추행행위를 한 것으로 보인다. 피고인과 피해자의 지위, 연령, 체격 차이 등에 비춰볼 때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하기에 충분한 것으로 보인다. … 교육적으로 순응하기 쉬운 초등학생 피해자를 상대로 뽀뽀나 입에 혀를 넣고 포옹하는 것에 피해자의 동의가 있다고 보는 것은 매우 납득이 되지 않는다. 연애 경험이 없는 어린 피해자의 무지와 지위 차이 등을 이용한 비정상적 행태로 볼 수밖에 없다.”
재판부는 한씨에게는 징역 2년6개월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40시간의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이수, 아동·청소년·장애인 관련 기관 3년 취업금지도 명령했다.
한씨가 재판부를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저는 인권침해를 한 적이 없고 아동을 함부로 대한 적이 없습니다. 반대 증거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미투 사건과 연관해 검찰, 사법부에서 이를 고려하지 않고 내린 잘못된 판결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씨는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형량이 적다고 판단한 검찰도 항소했다.
1심에서 유죄를 받아냈지만 피해아동 부모의 마음은 편하지 않다. 한예찬씨가 쓴 책이 도처에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동네 공공도서관에 갔는데, 동생이 그 사람 책을 꺼내 들고는 이 책을 읽어도 되냐고 물었다고 해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다 묻고 살고 싶어요. 하지만 그 사람 책과 동요가 아이들에게 노출되는 것은 막아야 하지 않겠어요.”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 누리집에는 한씨의 이름으로 책 94권, 전자책 38권이 검색된다. 서울시교육청 소속 16개 어린이도서관 통합 누리집에서도 675권이 검색된다. 이 가운데 148권이 대출 중(14일 기준)이다. 교보문고 누리집에서 한씨가 쓴 책을 검색해 봤다. 어린이(초등) 대상 86권, 어린이전집 24세트, 유아 대상 2권, 전자책 25권, 종교 관련 3권, 그가 가사를 쓴 동요가 들어간 음반 5장이 검색된다. 일부는 절판·품절됐지만 상당수는 여전히 팔리고 있다.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에서도 한예찬씨가 쓴 책 수십권을 빌려볼 수 있다.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 홈페이지 갈무리
한씨는 2017년 7월부터 경찰 수사를 받기 시작해 이듬해 7월 재판에 넘겨졌다. 그는 수사와 재판을 받던 시기 집중적으로 책을 냈다. 모두 24권에 이른다. 2018년 ‘틴틴 로맨스’ 시리즈 <말하는 인형 캔디>(1월), <피아노 펜션의 비밀>, ‘서연이와 마법의 시간여행’ 시리즈 <서연이와 마법의 결혼반지>, <서연이와 마법의 칼>, <아이 러브 루삐>(이상 4월), <사랑에 빠지는 요술 초콜릿>(6월), <서연이와 마법의 목걸이>(8월), <아이돌 스타 소미>(9월)에 이어, 2019년 <투명인간 최철민>(1월), <딱 99일간만 널 사랑할 수 있어>(4월), <서연이와 선화공주>(5월), 청소년 판타지소설 <아도나이 왕국과 아이돌의 꿈(상)(하)>(6월, 7월), <겨울왕국에서 온 요정 아나스타샤>(9월), <서연이와 평강공주>(10월)를 썼다.
2020년에는 <서연이와 마법의 샤프펜슬>(1월), <사랑이 이루어지는 러브 노트>(3월), <서연이와 의자왕의 딸 계선공주>(4월), <아도나이 왕국과 황금열쇠>(5월), <신데렐라는 미녀를 만든다>(6월), <서연이와 마법의 컬러렌즈>(7월), <바비공주 다혜와 화이트 슈즈>(9월), <서연이와 구슬아씨>(10월), <서연이와 마법의 슈퍼 백신>(11월)을 출간했다. 1심 선고가 임박한 순간까지도 책을 낸 것이다.
지난달 21일 서울 영등포구의 한 대형서점 초등학교 저학년용 서적 코너에 진열된 한예찬씨의 책들. 최우리 기자
한씨는 초등학생용 판타지 역사물을 주로 썼다. 한부모 가정에서 자란 ‘서연’이라는 여자 어린이가 등장하는 판타지물 <서연이와…> 시리즈는 한씨의 대표작이다. 피해아동 아버지는 “아이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가 많은 책이다. 아이가 엄마에게 직접 사달라고 해서 사 주었다”고 했다. 서울시교육청 어린이도서관 16곳에는 <서연이와…> 시리즈 175권이 비치돼 있다. 이 가운데 85권이 대출(14일 기준)될 정도로 인기가 많다. 교보문고 누리집에는 “아이가 서연이 시리즈를 많이 좋아합니다” “아이가 즐겨보던 시리즈라 구매했어요” “9세 아이가 하루에 다 읽었어요” “초3 딸아이가 서연이 시리즈 팬이네요” “넘 재밌다고 다른 시리즈도 사달랍니다” 등 아이 부모들의 리뷰가 달렸다.
한씨가 쓴 ‘틴틴 로맨스 시리즈’ 중에는 아이로 돌아간 성인과 미성년자의 ‘사랑’ 이야기가 있다. 한씨는 아동성추행 혐의로 기소되기 직전 <사랑에 빠지는 요술 초콜릿>을 출간했다. 10대 여주인공이 요술 초콜릿을 먹은 뒤 좋아하는 취업준비생 오빠와 같은 나이가 되고 싶다고 소원을 빈다. 여주인공이 어른이 되는 대신 오빠가 10대가 되면서 서로 마음을 확인하는 이야기다.
2019년 10월 출간된 <서연이와 평강공주> 책 소개글에 달린 독자들의 댓글. 교보문고 홈페이지 갈무리.
재판을 받던 때 나온 <딱 99일간만 널 사랑할 수 있어>도 판타지 형식을 빌려 미성년자와 어른의 사랑을 다뤘다. 인기 많은 남고생이 ‘밀크걸’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하얀 피부의 여고생을 좋아하게 된다. 알고 보니 이 여고생은 길거리에서 산 목걸이를 통해 99일 동안 20년 전 세계로 간 36살 여성이었다.
한씨는 10~11살 여자 어린이를 위한 성교육 도서를 쓰기도 했다. 2014년 개정판이 나온 <미소의 비밀노트>는 ‘10~11살 어린이들을 위한 성교육 성장동화’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아저씨가 핸드폰 사 줄게’ ‘단둘이 있으면 안 돼!’ ‘만지지 마세요!’ 등 어린이 성폭력 예방 수칙 등을 담고 있다.
한씨의 책 대부분을 펴낸 어린이도서 전문출판사 가문비 누리집에는 1심 유죄 판결이 나온 뒤에도 한씨의 책 43권이 그대로 판매되고 있다. 판타지 역사물인 <서연이와…> 시리즈에는 ‘초등 사회 5학년 2학기 1단원 교과연계’ 등의 설명을 달아놓았다.
한씨는 이 출판사와 10년 넘게 일했다고 한다. <한겨레>는 가문비 쪽에 한씨가 수사 대상이라는 사실을 언제부터 알고 있었는지 물었다. 출판사 쪽은 피해아동 쪽에서 한씨의 인세 가압류 신청을 한 2018년 9월부터 알게 됐다는 취지로 답했다. 그러면서 “연루됐다는 정도만 알았다. 자세한 건 작가의 사생활이라 꼬치꼬치 묻기는 어렵다”고 했다. 한씨가 아동성추행 혐의로 기소된 뒤에도 20권 가까운 책을 새로 출간한 이유에 대해서는 “이미 받아놓은 책이 많았다. 무죄추정원칙이 있는데 판결이 나오기 전까지 혐의만으로 (출간을) 정지하기가 어렵다. 일단 그분이 그랬을까 믿어지지 않았다. 무죄가 나올 거라, 판결이 좋게 나겠지 생각했다”고 했다. 한씨의 책에 그림을 그린 작가들은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한다.
한예찬씨와 10년 이상 함께 작업했다는 가문비 출판사는 1심 유죄 선고 이후에도 자사 홈페이지를 통해 그의 책을 계속 판매하고 있다. 가문비 홈페이지 갈무리
유죄가 확정되면 한씨의 아동·청소년 관련 기관 취업제한은 가능하지만, 그가 과거에 쓴 어린이 대상 출판물 처리 방법은 마땅한 게 없다. 이정연 여성가족부 아동청소년성보호과장은 “유죄 판결을 받은 작가가 학교 등에서 강연을 하는 건 막을 수 있지만 기존에 출간한 도서에 대한 처리 방법은 없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프리랜서로 일하는 작가의 경우 취업제한은 별다른 제약이 되지 못한다. 미성년자 성착취 엔(n)번방 사건 피해자 법률 지원을 하는 신진희 대한법률구조공단 변호사는 “출판사와 출간 계약을 하는 작가의 경우 출판사를 취업제한 기관이라고 보긴 어렵다. 다만 아동성범죄자가 아동동화작가로 남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했다.
국내에도 팬이 많은 일본 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원작자인 작가 쓰쓰이 야스타카가 2017년 위안부 소녀상과 관련해 자신의 트위터에 망언을 썼다. 이에
쓰쓰이의 소설을 국내 출간했던 출판사는 곧장 판매 중단을 결정하는 한편 출간 예정작도 계약 해지했다.
가문비 쪽은 “1심 판결이 나온 뒤 3권의 계약을 취소했다. 이미 써놓은 것도 중단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미 출간된 책들에 대해서는 “유죄 판결 나오기 전에 나온 책들이다. 책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 않으냐”고 했다. 시중에 깔린 책을 회수할지를 묻자 “어떻게 보면 우리도 피해자다. 내용에 문제가 있다면 회수하겠지만 피해가 너무 크다. 창고에 남은 책만 팔고 절판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했다.
한예찬씨는 판타지동화뿐 아니라 학생용 역사, 기독교 관련 서적을 주로 썼다. 서울시교육청 어린이도서관에서 빌린 한씨의 책들. 최우리 기자
실효적 대안은 없을까. 경기 용인시 수지구에 있는 느티나무도서관 박영숙 관장은 도서관 이용자에게 이런 작가들의 정보를 적극적으로 알리는 방법을 제안했다. 느티나무도서관은 쓰쓰이 망언 사건 당시 그의 책을 더 이상 도서관 장서로 보유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박 관장은 “한씨의 책을 직접 읽어보니
그루밍(길들이기 수법을 통한 성범죄) 위험이 높아 보인다. 몇몇 책은 도서관에 비치하기 어려운 수준”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 도서관은 부정적 이슈에 연루된 작가의 책의 경우 장서로 유지하더라도 책 표지에라도 관련 정보를 적어 이용자들이 알 수 있도록 한다. 사립은 물론 공립도서관·학교에서도 이런 내용을 의무적으로 공지하도록 하는 법적 근거 등을 마련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