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복무 없는 병역법 조항 ‘헌법 불합치’ 결정
“양심의 자유 침해 안돼” 내년 말까지 입법 요구
국방부, 현역보다 1.5~2배 긴 복무기간 검토
이진성 헌법재판소장을 비롯한 헌법재판관들이 28일 오후 서울 재동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양심적 병역거부 허용 여부 선고를 하기 위해 자리에 앉아 있다. 이날 헌재는 종교적 신념이나 양심을 이유로 입영 또는 집총을 거부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해 대체복무제를 규정하지 않은 병역법 조항이 헌법에 합치하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종교적 신념이나 양심을 이유로 입영 또는 집총을 거부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해 대체복무제를 규정하지 않은 병역법 조항이 헌법에 합치하지 않는다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왔다. 헌재는 병역거부자 처벌 규정 자체는 합헌으로 결정하면서도, 양심적 병역거부자는 처벌하지 않는 것이 옳다는 뜻을 밝혔다.
1950년 이후 지금까지 70년 가까이 1만9천여명이 병역법 위반 등으로 처벌된 끝의 결정이다. 남북분단 현실 등을 이유로 모두에게 같은 방식으로 일률적으로 국방의 의무를 요구하던 데서 벗어나 개인의 양심과 존엄, 가치가 서로 다른 모습 그대로 최대한 존중되어야 한다는 쪽으로 우리 사회의 인식이 옮겨진 것을 반영한 결정으로 평가된다.
헌법재판소는 28일 병역법 조항(제88조 제1항, 제5조 제1항 등)의 위헌 여부를 판단해달라며 양심적 병역거부자들과 법원이 낸 헌법소원·위헌법률심판제청 사건 28건에서, 병역의 종류에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제를 규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병역법 제5조 제1항에 대해 재판관 6(헌법불합치) 대 3(각하) 의견으로 헌법불합치 결정을 선고했다. 헌재는 병역 종류를 규정한 병역법 규정이 2019년 12월31일까지 대체복무제를 포함하는 내용으로 개정되어야 하며, 개정 이전까지는 그대로 적용된다고 밝혔다.
세계 병역거부자의 날인 지난해 5월15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국제앰네스티가 연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병역거부로 처벌을 받았거나 재판중인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의 병역거부자에 대한 처벌 중단과 대체복무제 도입을 촉구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헌재는 “현역·예비역·보충역·병역준비역·전시근로역 등 현행 병역 종류는 모두 군사훈련을 받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으므로 양심적 병역거부자에게 병역 종류 조항에 규정된 병역을 부과하면 그들의 양심과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충분히 병역의 대안이 될 수 있는 대체복무제를 규정하지 않은 병역 종류 조항은 과잉금지 원칙에 위배돼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결정 이유를 밝혔다. 헌재는 이어 “이른바 소수자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이를 반영하는 것은 관용과 다원성을 핵심으로 하는 민주주의의 참된 정신을 실현하는 길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헌재는 그러나 정당한 사유 없이 입영 등을 거부하면 처벌하도록 한 병역법 제88조 제1항의 처벌 조항에 대해서는 합헌 4, 일부 위헌 4, 각하 1 의견으로 위헌 정족수에 못 미쳐 합헌 결정했다. 다만, 처벌 조항에 위헌 의견을 밝힌 재판관 4명 외에 합헌 의견 중에서도 강일원·서기석 재판관은 “대체복무제가 규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양심적 병역거부를 처벌하는 것은 헌법상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므로, 양심적 병역거부는 ‘정당한 사유’에 해당한다”며 “이는 처벌 조항 자체의 문제가 아니므로 입법부의 개선 입법과 법원의 후속 조처를 통해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고 밝혔다. 이런 의견은 법원이 양심적 병역거부를 병역법상의 ‘정당한 사유’로 판단해 처벌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을 내비친 것으로 풀이된다.
이번 결정에 따라 국회에서 법이 고쳐진 뒤 또는 헌재가 정한 개선 입법의 시한 이후인 2020년부터는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기소가 불가능할 것으로 보이다. 검찰도 그동안 기소를 삼갈 전망이다. 상고심 196건을 포함해 법원에 계류 중인 913건의 양심적 병역거부 사건도 헌재의 이번 결정과 대법원의 판례 변경에 맞춰 무죄를 선고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병역법 처벌 조항에 대해선 합헌으로 결정돼 당장 재심을 어려울 전망이다. 이 사건을 전원합의체에 넘긴 대법원이 기존의 유죄 판례를 바꾸면 실질적인 재심사유가 될 수 있다. 병무청에 따르면 2013년 이후 올해 5월 말까지 6년간 양심적 병역거부로 형이 확정된 사람은 1790명이며, 재판을 받고 있는 사람은 966명에 이른다.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이날 오후 헌재 결정 선고 뒤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한국은 양심에 따라 병역거부자들에게 대체복무제 없는 유일한 나라”라며 “늦었지만 축하할 만한 결정”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국회는 대체복무제를 입법해야 함은 물론, 이미 처벌받은 이들을 사면하고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남은 형기도 대체복무로 대체할 수 있도록 검토해야 한다”고 밝혔다.
현행 병역법은 병역의 종류를 현역·예비역·보충역·병역준비역·전시근로역 등 다섯 가지로 한정해 열거하고 있다. 또 현역 입영 통지를 받은 사람이 정당한 사유 없이 입영을 거부하면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이 조항을 근거로 기소돼, 군 복무 기간과 비슷한 징역 1년6개월의 실형을 일률적으로 선고받았다. 1950년 이후 지금까지 양심적 병역거부로 처벌받은 사람은 1만9천여명에 이른다.
헌재는 2004년과 2011년 두 차례에 걸쳐 재판관 7대2의 의견으로 양심적 병역거부자 처벌을 합헌으로 결정했다. 앞서 <한겨레21>은 2001년 2월 종교적 이유에 따른 양심적 병역거부를 처음으로 인권 차원의 문제로 제기했으며, 같은 해 12월 불교 신자인 오태양씨가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병역거부를 선언해 본격적인 사회적 논의가 시작됐다.
여현호 선임기자 yeop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