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논픽션 : 본헌터⑤] 나는 A5-4다 절규가 보인다고 했지만, 그것은 내 얼굴이 아니다
나는 참호 속에서 오래도록 쪼그려 앉아있던 A4-5 옆에서 엎드린 채 발견되었다. 당신은 지금 내 얼굴뼈가 아니라 머리뼈 밑면을 보고 있다. 구멍 3개 덕분에 뭉크의 절규라는 호칭을 얻었다. 사진 주용성 작가 제공.
*편집자 주: ‘본헌터’는 70여년 전 국가와 개인 사이에 벌어진 집단살해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이야기다. 아무 데나 버려져 묻힌 이들과, 이들의 행방을 추적하며 사라진 기억을 찾아 나선 이들이 주인공이다. 매주 2회, 월요일과 수요일 인터넷 한겨레에 올린다. 극단 신세계가 글을 읽어준다.
나는 엎드려 있었다.
얼마 동안 엎드려 있었냐면, 아주 오래 엎드려 있었다. 날짜로 말해야 한다면, A4-5와 똑같은 이야기를 들려줘야겠다. 2만6440일 이상 엎드려 있었다. 시간으로 환산하면, 63만4560시간 이상 엎드려 있었다. 73년 동안 엎드려 있었다. A4-5가 그 긴 시간 개인 참호 속에서 쪼그려 앉아있을 때, 나는 그 옆으로 난 교통호(참호와 참호 사이를 안전하게 다닐 수 있도록 판 구덩이)에 엎드려 있었다. 나는 A5-4다.
A4-5를 본 사람들은 머리뼈 사이로 억울한 표정이 보인다고 했던가. 나를 본 사람들은 절규가 보인다고 했다. 누구의 절규인가. 뭉크의 절규다.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의 그림 <절규>를 보는 듯하다고 했다. 스크림이라고도 했다. 영어 제목으로는 ‘더 스크림’(The Scream)이니까. 나를 보라, 자세히 보라. 당신은 지금 내 얼굴 뼈를 본 것이 아니다. 뒷머리를 본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머리뼈 밑면을 본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엎드려 있는 셈이다.
나는 완전유해로 분류되었지만, 사라진 뼈가 많았다. 갈비뼈와 어깨뼈가 없었다. 빗장뼈와 발가락과 손가락뼈들도 일부만 발견되었다. 그래도 척추와 다리뼈와 등뼈가 나왔다. 골반 일부와 사지 뼈들도 나왔다. 사진 진실화해위 제공
“수십명의 젊은 남자들이 산에 올랐다. 중학교 교복을 입고 오른 이도 있었다. 산책이 아니다. 가을 소풍도 아니다. 햇살이 쏟아져내렸다….” 사진 주용성 작가 제공
1893년 <절규>를 그린 뭉크는 이런 글을 남겨놓았다고 한다. “두 친구와 함께 산책을 나갔다.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그때 갑자기 하늘이 핏빛처럼 붉어졌고 나는 한 줄기 우울을 느꼈다. 친구들은 저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고 나만이 공포에 떨며 홀로 서 있었다. 마치 강력하고 무한한 절규가 대자연을 가로질러가는 것 같았다.”
오, 낭만적인 뭉크여. 나는 뭉크의 글을 이렇게 고쳐본다. “수십명의 친구들과 함께 산을 올랐다. 두 손이 묶인 채 산에 올랐다. 산책이 아니다.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그때 갑자기 주변이 핏빛으로 붉어졌고 나는 한 줄기 의식조차 느낄 수 없었다. 친구들은 저 앞으로 걸어가 쓰러졌다. 나와 친구들에겐 공포조차 사치였다. 강력하고 무한한 절규가 대자연을 가로질러 울려 퍼졌다.”
나를 다시 보라. 세 개의 구멍이 보이는가. 이 구멍은 설명이 필요하다. 가운데 구멍은 뒷머리뼈에서 ‘으뜸 구멍’(basion)으로 불린다. 이 구멍으로는 중추신경줄기가 지나간다. 머리와 몸체를 이어주는 길이다. 그럼 양쪽의 구멍은 무엇일까. 나를 감식한 전문가는 “시간이 지나면서 부식된 것 같다”는 소견을 밝혔다. 너무 얇아서 원래 부서지기 쉬운 곳이다. 총탄 구멍으로는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아마도 가슴이나 배에 총을 맞은 것 같다고 했다. 다른 지역에서는 엎드린 이들의 등을 발로 밟고 뒤에서 머리통에 총을 쏘았다고 했다는데, 내 머리통에 그런 흔적은 없다.
발견 당시 내 다리가 펴져 있던 걸로 보면 나는 마지막 순간 서 있었다. 수십여명이 교통호에 두 줄로 서 있었다. 쪼그려 앉은 A4-5의 얼굴을 마주 보는 방향이었다. 놈들은 무작위로 총을 갈겼다. 그것도 아주 가까운 곳에서 갈겼다. 교통호에 탄피가 무지하게 나온 것을 보면 그렇다. 내 뼈 옆에서도 M1 탄피가 네 개 나왔다. 탄피 하나에는 4와 3이라는 숫자와 T와 W라는 영어 스펠링이 쓰여 있었다. 그러니까 1943년 미국의 트윈시티 병기창(Twin Cities Ordnance Plant)에서 제조됐다는 뜻이다.
나는 보도연맹원인가? 아닐 것이다. 발굴된 보도연맹원들의 유해 옆에는 일제가 남기고 간 38식, 99식 소총 탄피가 주로 나왔다고 한다. 나를 쏜 놈들은 미군에게 소총을 얻었을 것이다. A4-5가 말한 것처럼, 그 날은 1950년 10월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뒤 미군이 이곳을 지나갔다. 그리고 놈들은 나를 이곳으로 끌고 왔다. 내가 보도연맹원이 아니었다면 도대체 무슨 혐의였을까.
나는 완전유해로 분류되었지만, 사라진 뼈가 많았다. 갈비뼈와 어깨뼈가 없었다. 빗장뼈와 발가락과 손가락뼈들도 일부만 발견되었다. 갈비뼈는 잘 부서진다고 했다. 갈비뼈는 감식 과정에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부위가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그래도 척추와 다리뼈와 등뼈가 나왔다. 골반 일부와 사지 뼈들이 나왔다. 반쪽의 40%가 나오면 완전 유해로 본다고 했다. 왼쪽이 나오면 거울처럼 오른쪽도 보이는 법이다, 나를 감식한 전문가들은 나이를 25~29살이라고 추정했다. 어쩌면 나는 함께 묻힌 동료들 중에서 나이 든 축이었는지도 모른다. 키도 무척 컸다. 170.4㎝였다. 내 뼈 옆에서는 철제 고리형 벨트 버클이 나왔다. 대일본 소화(大日本 昭和)라고 적힌 일본 동전도 나왔다. 신발 밑창 조각도 나왔다.
A17의 유해는 두 사람 것이었다. 오른쪽의 정강이뼈와 허벅지뼈로 추정컨대 연골형성 부전증 환자였다. 다리가 심하게 짧은 장애인이었다. 사진 진실화해위 제공
A17과 A18이 발견된 구역. 이들은 모두 일부 뼛조각으로만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사진 진실화해위 제공
A19는 세 명이었다. 이들의 머리뼈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사진 진실화해위 제공
그나마 나는 행운이었다. 구멍이 뚫렸을지언정 머리뼈가 나왔으니까. 내가 발견된 곳으로부터 북쪽으로 4m 떨어진 A9 구역부터 머리뼈가 없었다. 특히 더 북쪽에 있던 A17, A18, A19의 상태는 심각했다. 이들은 모두 일부 뼛조각으로만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다리가 펴져 있었는지, 구부려져 있었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는 상태였다. A17, A18, A19는 도합 일곱 사람이지만 A17-1, A17-2처럼 나뉘어 호명되지 않았다. 발견된 뼈가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A17과 A18은 각각 두 사람, A19는 세 명이었다. A17은 깨어진 아래턱과 치아, 골반 일부, 허벅지뼈와 정강이뼈가 나왔다. 두 사람의 뼈가 섞여 있었다. 둘 중의 하나는 연골형성 부전증 환자였다. 짧고 불규칙하게 생긴 정강이뼈와 허벅지뼈가 그걸 증명했다. 다리가 심하게 짧았으리라. 사람들에게 ‘난쟁이’로 불렸으리라. 장애인도 예외 없이 끌려온 것이다. A18은 위팔뼈, 아래턱, 부서진 위턱이 나왔다. A19는 위턱과 치아 잇몸, 그리고 허벅지뼈 일부가 나왔다. 땅이 눅눅했다. 처음에는 단단한 화강암이었으나 풍화작용을 거치면서 부스러진 모래가 비탈에서 내려오는 진흙과 만났다. A17, A18, A19는 제대로 묻히지 않아 일찌감치 머리뼈가 굴러서 내려갔을 수도 있다. 들개가 밖으로 삐져나온 머리뼈를 물고 산을 쏘다녔을 수도 있다.
중학생(당시 중고등학교 통합 학제)의 교복 단추로 보이는 유품들이 많이 나왔다. ’천농’이라는 단추는 망자가 천안농업학교 학생이었음을 말해준다. 사진 주용성 작가 제공
무엇보다 A17, A18, A19엔 어린 학생들이 있었다. 이들의 뼈가 발견된 곳에서는 중(中)자 동복 단추가 많이 나왔다. 여러 단추들이 섞인 걸 보면 여러 중학교의 학생들이 섞였다. 1950년대 중학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통합된 곳이었다. 청동버클도 나왔다. ‘천농’(天農)이라고 쓰인 단추도 나왔다. 천안농업학교 학생이다. 이들은 교복을 입고 있었다는 이야기인가. 뼈로 보건대 나이는 16~20살, 18~22살 사이로 추정되었다. 머리뼈가 없어 나처럼 뭉크의 표정조차 짓지 못한 너희들. 다시 뭉크의 글을 고쳐본다. “수십명의 친구들과 함께 산을 올랐다. 교복을 입고 산을 올랐다. 산책이 아니다. 가을 소풍도 아니다. 햇살이 쏟아져내렸다….”
오 뭉크여, 스크림이여, 중학생의 절규여.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를 맡고 있다.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라는 책을 썼다. 2000년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관한 미군 비밀문서를 최초 보도했고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 한국어판과 일본어판, 베트남어판을 냈다. 베트남전에 이어 이번엔 한국전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