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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합기도는 몸과 마음을 닦는 도구였다 [본헌터④]

등록 2023-07-05 11:00수정 2023-07-17 11:30

[역사 논픽션 : 본헌터④] 합기도를 하는 소년
중학교 때 성무관에서 시작한 무술, 박상범과 미야모토 무사시라는 모델
1960년대 성무관에서의 합기도 대련. 위의 사람이 선주.
1960년대 성무관에서의 합기도 대련. 위의 사람이 선주.

*편집자 주: ‘본헌터’는 70여년 전 국가와 개인 사이에 벌어진 집단살해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이야기다. 아무데나 버려져 묻힌 이들과, 이들의 행방을 추적하며 사라진 기억을 찾아나선 이들이 주인공이다. 매주 2회, 월요일과 수요일 인터넷 한겨레에 올린다. 극단 신세계가 글을 읽어준다.
선주는 오늘도 도장에 간다.

하얀 무도복으로 갈아입고 매트 위에 선다. 대련자와 함께 꺾기, 던지기, 발차기의 여러 기본 동작을 연마하고 또 연마한다. 쉬는 날이 없다. 학교에 가는 날이면 반드시 도장에 간다. 중고등학교 시절엔 오후 5시, 방과 후에 갔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는 새벽 5시에 일어나 버스를 타고 갔다. 정확히 6시부터 수련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일상이 돼버린 합기도다.

원래는 유도를 배웠다. 1961년 5·16쿠데타가 일어나기 직전, 서울 종로구 조계사 부근에 있는 중동중학교에 입학했다. 막 창설된 유도부가 학생들을 모집했다. 체육 선생님이 유도 2단이라고 했다. 동네 형들과 역기나 아령을 들면서 알통 키우는 흉내를 냈던 선주는 유도부에 들어갔다. 소공동에 있는 유도학교(현 용인대학)에서 일주일에 두 번씩 연습했다. 낙법을 익히기 위해 죽어라고 내던져졌다. 한 학기가 끝날 무렵, 한 친구가 합기도를 배운다고 했다. 바로 실전에 쓸 수 있다며 자랑을 했다. 친구를 따라 종로1가 보신각 옆 건물 4층의 성무관이라는 합기도장에 갔다. 유단자들이 공중을 날면서 발차기를 했다. 근사해 보였다. 그날부로 유도를 때려치웠다. 합기도로 전향했다.

중학교와 합기도장은 모두 종로에 있었으니, 걸어서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합기도를 소개해준 친구는 몇 달 지나지 않아 도장에 나오지 않았다. 선주는 끈기가 있었다. 하얀 띠로 시작했던 선주는 중2 때 파란 띠를 맸다. 중3 때 빨간 띠를 맸다. 고1 때는 빨간 줄이 들어간 검은 띠를 맸다. 드디어 초단, 유단자가 된 것이다. 단수를 높이는 재미와 보람이 있었다. 고3 때 2단, 대학 2학년 때 3단, 대학 졸업할 때 4단, 미국으로 갈 때 6단이었다. 미국에서는 드디어 7단이 되었다. 왜 이토록 합기도에 미친 것일까. 한번 꽂히면 끝까지 가는 게 선주의 기질이었다. 아니, 그런 기질이 합기도를 하면서 생겼다.

합기도는 어릴 적 일본인의 양자로 바다를 건너간 최용술이 창시자라고 했다. 일본 황실의 무술로 알려진 ‘야와라’를 습득하고 해방 후 대구로 와 도장을 내면서 퍼졌다고 했다. 최용술은 유도나 주짓수에 가까운 야와라에 택견의 발차기 기술을 접목해 독자적인 합기무술을 창안했다. 최용술이 대구의 도장에서 가르친 제자 지한재가 1957년 서울 종로에 올라와 차린 도장이 바로 성무관이었다. 지한재는 이소룡이 1978년 감독과 주연을 맡은 영화 <사망유희>에 합기도 고수로 출연한 인물이기도 했다.

선주는 무술영화에 엑스트라로 출연하기도 했다. 고등학생 시절이다.
선주는 무술영화에 엑스트라로 출연하기도 했다. 고등학생 시절이다.

1960년대 초반 종로에는 무덕관, 청도관이라는 태권도장이 유명했다. 태권도를 하는 이들 사이에서는 무덕관이 더 세니, 청도관이 더 세니 하는 논쟁이 벌어질 때였다. 태권도의 동작은 그다지 화려해 보이지 않았다. 선주의 눈에는 합기도가 더 멋졌다. 태권도 발차기는 직선으로 뻗는데 반해, 합기도의 발차기는 상대방의 힘을 이용한 회전공격에 가까웠다. 확실히 합기도는 새로운 트렌드의 무도였다. 기술이 3800가지라고 했다. 꺾기, 던지기, 발차기는 상대방이 팔을 잡느냐, 발로 차느냐, 목을 조르느냐, 뒤에서 공격하느냐에 따라 다른 방어동작으로 세분됐다. 이런 점들은 합기도가 실전에 능하다는 세평을 얻는 데 한몫했다.

실전은 싸움을 의미했다. 국민학교 다닐 때 동네 친구들과 놀이 삼아 패싸움을 한 적은 있지만, 실전은 일대일 결투였다. 결투를 함부로 해서는 안되었다. 명동 거리 한복판에서 유도학교 출신과 태권도 청도관 출신 사이에 맞장을 떴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지만, 선주는 싸움꾼이 아니었다. 성무관에서는 “시비가 붙으면 무조건 사과부터 해라, 절대 먼저 공격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래도 실전에 써먹어야 한다며 별별 연습들을 다 했다. ‘월장법’이라고 불리는 담 넘어가는 기술을 익히기도 했다. 수건을 담에 건 뒤 그 힘으로 발을 굴러 담을 한 번에 뛰어넘는 거였다. 대련하다 쓰러지면 한 번 구른 뒤에 칼을 주워 던지는 동작을 연마해 보기도 했다. 압정이나 못, 단검을 베니어판에 던져 꽂히도록 하는 연습도 했다. 무술영화 속의 자객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유치한 면이 있었지만 진지했다.

선주(맨 왼쪽)는 서울 조계사 부근의 중동중학교를 다녔다. 학교 정문 앞에서.
선주(맨 왼쪽)는 서울 조계사 부근의 중동중학교를 다녔다. 학교 정문 앞에서.

선주가 중학생으로 성무관에 다닐 때 모두가 선망해마지 않는 대선배 한 명이 있었다. 대학생이라고 했다. 시간이 흘러 1971년 청와대 경호실로 입성한 그의 이름은 박상범이었다. 1974년 8월15일 29주년 광복절 기념식이 열린 국립극장에서 대통령 부인 육영수가 문세광의 총탄에 맞던 순간 연단 앞으로 나가 과감히 권총을 겨눈 그 박상범이었다. 1979년 12월26일 밤 궁정동의 경호실 요원 중 유일하게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총을 맞고도 살아난 그 박상범이었다. 그는 성무관에서 고수 중의 고수로 통했다. 선주도 어느덧 누구나 인정하는 고수가 되었다. 1968년 대학 1학년 때 서울의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1회 전국합기도통합시범대회에 참가해 검술 시범으로 최우수상을 받은 것이다. 이날 최용술은 합기도 도주로 추대되었다. 선주는 나중에 청와대 경호실장이 되어 김재규의 총탄에 비극적으로 죽은 차지철 민주공화당 의원의 얼굴을 그곳에서 처음 보았다. 선주도 경호원이 되거나 전문 무도인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그럴 마음은 들지 않았다. 무술을 직업으로 삼고 싶지는 않았다. 합기도는 몸과 마음을 닦는 도구였다.

선주는 미야모토 무사시(1582~1645)를 흠모하며 그가 쓴 <오륜서>를 탐독했다. <오륜서>는 일본의 <손자병법>이라 불렸다. 무사시는 일본의 수많은 검객 중에서 가장 큰 인기를 누려온 국민적 영웅이었다. 그는 60여 차례의 결투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고 했다. ‘병법의 도’를 추구했던 미야모토 무사시에게서 가장 압도당한 대목은 ‘마음의 칼’이었다. 무사시는 긴 칼을 찬 사람과의 결투를 앞두고, 배 젓는 노를 밤을 새워 날카롭게 깎았다고 했다. 노를 칼로 벼리며 정신을 벼린 것이었다. 그 칼로 상대를 제압했음은 물론이었다. 관음상 조각을 깎은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다, 마음에 들 때까지 밤새 깎고 또 깎다 보니 관음상 조각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거였다. 그 집중력을 소유하고 싶었다. 선주도 언제부턴가 무언가에 집중하면 그 일에 관해 끝장을 보게 되었다. 무엇보다 몸이 가벼워지고,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합기도는 선주의 정신적 바탕이자 원기(元氣)의 근원이 되어주었다.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를 맡고 있다.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라는 책을 썼다. 2000년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관한 미국 비밀문서를 최초 보도했고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 한국어판과 일본어판, 베트남어판을 냈다. 베트남전에 이어 이번엔 한국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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