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4월 신혼여행 길. 포니를 끌고 이천 온천을 시작으로 나라 곳곳을 돌았다.
*편집자 주: ‘본헌터’는 70여년 전 국가와 개인 사이에 벌어진 집단살해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이야기다. 아무데나 버려져 묻힌 이들과, 이들의 행방을 추적하며 사라진 기억을 찾아나선 이들이 주인공이다. 매주 2회, 월요일과 수요일 인터넷 한겨레에 올린다. 극단 신세계가 글을 읽어준다.
사랑이 꽃피는 계절이었다.
싱싱한 초록의 나뭇잎들이 연도에 도열해 축하박수를 쳐주는 기분이었다. 선주의 마음도 부풀어 올랐다. 짙은 감색 양복에 붉은 색 니트를 입고 넥타이도 맸다. 서울 중곡동에서 출발한 폭스바겐 승합차가 광화문 중앙청을 지나 아현동을 거쳐 양화대교로 들어섰다. 김포공항 국제선 출국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내일이면 두희를 만난다.
신혼이었다. 결혼식을 올린 지 한달이 조금 넘었다. 2주간 신혼여행을 다녀온 뒤 신부는 미국에 건너갔고, 이제 신랑이 갈 차례였다. 배웅해줄 가족들이 폭스바겐 승합차량에 탔다. 형수, 어머니, 누나 두명. 맨 뒷좌석에는 큼지막한 이민용 가방 두개와 캐리어가 실렸다. 책과 살림살이는 배에 이미 실어 보낸 상태였다.
대학 1학년 때 돌아가신 아버지 노릇을 열 두살 위 큰 형님이 해줬다. 배포 크게 사업을 운영하는 큰 형님은 가끔 집안을 말아먹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놀라운 회복력을 발휘해 재기했다. 큰 형님이 없었다면 미국행은 꿈꾸지 못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큰 형님은 일주일 전 자동차 사고를 당해 조카와 함께 병원에 있었다. 그거 하나만 빼면 모든 게 순조로웠다. 선주는 두희와 한 달 전 결혼식을 했고, 혼인신고는 일찌감치 1년 전에 했다. 혼인신고 스토리를 들려주면 사람들은 깜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당장 손으로 움켜잡아야 하는 것이었다. 선주는 그랬다.
만난 지 일주일 되던 날 선주는 두희에게 핑크빛 장미 한 다발을 선물했다. 달달한 청혼이었다. 그리고 화끈하게 법적 절차를 밟았다. 청혼 당일 두희의 본적을 떼오게 한 뒤 함께 자신의 본적지를 관할하는 마포구청으로 갔다. 혼인신고 서류를 접수했다. 두희는 벙 찐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면서도 순순히 도장을 찍었다. 곧 미국으로 떠나는 그녀를 꽉 잡아놓아야 했다.
1979년 5월20일,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로 갈아타기 직전 일본 하네다 공항에서.
1978년 봄, 벚꽃이 캠퍼스에 피어날 무렵 두희를 처음 만났다. 졸업 후 고교 선생으로 일하는 대학 산악반 선배가 주선한 자리였다. 한때 지게 배낭을 지고 함께 산에 오르던 사이였다. 이민간 자신의 옛 제자가 오랜만에 한국에 왔다면서 소개해주겠노라고 했다. 선주는 박사과정 대학원생이었다. 두희는 미국에서 대학을 중퇴하고 백화점에 다닌다고 했다.
선주는 31살, 두희는 22살이었다. 첫 대면 때는 대학원생 동료 예닐곱명이 몰려왔다. 내밀한 이야기를 할 틈이 없었다. 두 번째부터 단둘이 만났다. 네 번째 만날 때 선주는 자신의 손가락에 있던 금반지를 두희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엄마가 준 건데, 맘에 드는 사람 생기면 주라고 했어.” 엄마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진심이었다. 두희는 반지를 순순히 받았다.
일주일을 만났다. 확신이 들었다. 이야기가 통했다. 평생 같은 곳을 바라보고 살만한 사람 같았다. 이 여자를 놓치면 안 되었다. 인생을 걸기로 했다. 샌프란시스코의 아이매그닌 백화점 전산실에서 일하는 두희의 외모는 화려했다. 아이매그닌 백화점은 1913년 조셉 매그닌이라는 인물이 아버지 아이작 매그닌의 이름을 따 세운 럭셔리 백화점이다. 선주는 두희의 화려함 속에 감춰진 검소함과 때묻지 않은 성정을 꿰뚫어보았다. 반했다.
혼인신고 일찍 하기를 잘했다. 덕분에 빨리 배우자 비자를 얻어 미국 가는 수속이 수월했다. 미국에서 신혼살림을 차린 뒤 미국의 대학 문을 두드려 볼 계획이었다. 도착하자마자 토플 시험 준비부터 해야 했다. 영어도 더 갈고 닦아야 했다. 선주는 버클리 대학 박사과정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비행기 트랩에 올랐다. 도쿄 하네다로 가는 일본항공(JAL)이었다. 환송장 유리창 너머 손을 흔드는 가족들이 보였다. 선주도 손을 흔들었다. 비행기가 떠올랐다. 선주의 인생이 모험의 항로를 향해 이륙하는 순간이었다. 두려움은 없었다. 젊은 시절, 죽을 고비도 넘겨보았다. 태생적인 낙관과 긍정의 힘이 있었다. 생전 처음 타보는 비행기였다. 일본인 여승무원이 기내식 주문을 받을 때 무릎을 꿇는 모습이 낯설고 신기해 자꾸만 시선이 갔다.
선주와 두희가 만난 지 일주일 만에 혼인신고를 하자 처가에서는 황당해했다. 두희의 오빠들은 선주의 주변 사람들을 수소문하며 신원확인을 하는 낌새였다. 두희와 함께 한국에 온, 장모 될 사람을 만났다. 결혼을 승낙해야 하나 망설여져 기도원까지 갔노라고 했다. 어떻게 벼락같이 혼인신고를 했냐고 타박을 하면서도, 결혼에 관해선 하나님께 ‘예스’를 받았다고 했다. 선주는 장인 될 사람에게 편지를 썼다.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에 관해, 8절지 갱지에 빼곡히 서술했다. 장인이 선주 얼굴을 보기 위해 한국에 왔을 때는 김포공항에 나가 큰절을 했다.
결혼식 날짜가 정해졌다. 1979년 4월14일. 그 사이 선주는 두희에게 매일 항공우편을 보냈다. 매일 절절한 편지 문장이 쏟아져 나왔다. 드디어 4월14일이 왔다. 홍릉의 세종대왕 기념관에서 신랑·신부는 행진을 했다. 두희는 일주일 만에 떠났다. 이제 선주가 둘만의 새로운 둥지를 향해 가는 길이었다.
환승을 하는 하네다 공항 면세점에서 카메라를 샀다. 앞으로의 연구 작업을 위해 카메라가 필요했다. 아사히 펜탁스, 300달러를 지불했다. 다음날 오전 동이 틀 무렵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내렸다. 공항에는 큰 처남과 두희가 나왔다. 큰 처남이 베이지색 뷰익을 운전했다. 공항을 빠져나오면서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건물들은 의외로 나지막했다. 양 옆에 늘어선 주택들은 이쁘고 평화롭기만 했다. 다운타운으로 들어서자 큰 빌딩들이 나타났다. 재난영화 <타워링>에서 본 높다란 빌딩의 숲이 펼쳐졌다. 멀리 샌프란시스코의 랜드마크라고 하는 골든게이트브릿지가 눈에 들어왔다. 세계 최초의 현수교라고 했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듯한 그림 같은 풍경에 감탄을 했다. 처가는 샌프란시스코 피어39가였다. 그 바로 옆 25가의 아파트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할 참이었다.
사랑에 불타는 청춘이었다. 한 사람을 사랑해서 결혼을 했다. 향학열에 불타는 청춘이었다. 또 하나의 꿈은 사람이었다. 사람은 필생의 연구 과제이기도 했다. 사람이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의 뼈였다. 선주는 혼잣말처럼 말하곤 했다. 나는 사람을 할 거야. 선생님에게도 말했다. 저는 사람을 하겠습니다.
1979년 5월21일. 선주는 처가집에 짐을 부렸다. 10년의 미국 생활 출발선에 섰다.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진실화해위원회를 맡고 있다.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라는 책을 썼다. 2000년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관한 미국 비밀문서를 최초 보도했고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 한국어판과 일본어판, 베트남어판을 냈다. 베트남전에 이어 이번엔 한국전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