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논픽션 : 본헌터㊾] 미제의 유해들 오전 10시 사형집행되어 오후 1시 묻히기까지 최적의 조건은
*편집자 주: ‘본헌터’는 70여년 전 국가와 개인 사이에 벌어진 집단살해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이야기다. 아무데나 버려져 묻힌 이들과, 이들의 행방을 추적하며 사라진 기억을 찾아나선 이들이 주인공이다. 매주 2회, 월요일과 수요일 인터넷 한겨레에 올린다. 극단 신세계가 글을 읽어준다.
위대한 저격자 안 의사의 순국 직전 촬영 모습. 2010년 1월 하얼빈 의거와 순국 100주년을 기념해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유묵전 '안중근, 독립을 넘어 평화로' 에서 전시됐다. 연합뉴스
내 이름은 선주다.
서울 아현동에서 태어나 사대문 안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공부보다 무술에 더 탐닉했던 선주다. 젊은 시절 피를 토하는 폐결핵과 싸우며 죽음의 그림자를 이겨낸 선주다. 원자력공학도와 기자를 꿈꿨으나, 재수해서 들어간 대학 은사 손 선생과의 만남으로 운명이 바뀐 선주다. 그 운명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이러할 것이다. 석장리에서 공수리까지. 석장리는 공주에 있고, 공수리는 아산에 있다. 또 다른 말로 하면 이러할 것이다. 구석기시대에서 한국전쟁까지. 예외적으로, 21세기에 일어난 세월호 사건도 있다. 나는 선사시대와 근현대사의 사람과 유적이 묻힌 현장을 추적해 발굴하고 증언해왔다. 매개체는 뼈였다. 나는 체질인류학자다. 나는 본헌터(bone hunter)다.
유학생활을 한 버클리대학에서 내 눈 앞을 빠르게 스쳐지나가던 뼈들을 떠올려본다. 이른바 땡 시험이었다. 순식간에 그 뼈들의 이름을 맞혀야 했다. 20초가 지나면 종이 땡 울리고 다음 뼈가 왔다. 조각만 보고도 그것이 사람의 위팔뼈인지 돼지의 허벅지뼈인지를 판별해내야 했다. 4층 건물이 통째로 뼈 실습실과 수장고였던 버클리에서 나는 동물뼈와 사람뼈의 바다에 빠져 지냈다. 에티오피아의 초원에서 발견된 루시(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가 인류의 진짜 조상인지를 논쟁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몰랐다. 내가 유학생활 10년을 마치고 한국에 나와서도 이렇게 지독한 본헌터의 삶을 살게 될 줄은.
본헌터란 무엇인가. 뼈에 눈을 번뜩이는 사냥꾼이다. 숨은 뼈를 찾아내는 사냥꾼이다. 그 뼈에 담긴 수수께끼를 푸는 사냥꾼이다. 이제 내 입을 빌려 말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를 가져본다. 풀지 못한 매듭, 그리고 어떤 아쉬움에 관해서 말해보고자 한다.
중국 다렌시 뤼순구에 있는 뤼순일아감옥구지(旅順日俄監獄舊址) 전경. 앞 건물은 사무실과 전시실로 쓰이고 있고, 뒷 건물은 박물관으로 사용중이다.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 보고서
본헌터로서 나는 산에서, 섬에서, 평야에서 땅 속을 파헤쳐 뼈를 꺼내고, 닦고, 분석하다가 늙어버렸다. 전선의 맨 앞에서 적의 총알받이가 돼야 했던 국군 전사자, 전쟁기에 결코 있어서는 안될 광기에 의해 떼죽음을 당해야 했던 민간인 희생자, 일제강점기에 머나먼 타국에서 강제노동 끝에 죽음을 당한 징용자, 그리고 실미도·선감학원 등 인권침해 사건의 희생자들. 식민지와 전쟁, 분단시대 권위주의 정부로 이어진 대한민국의 특별한 역사가 아니었다면 나도 이 일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 자취를 따라다니다 보니 세월이 갔다. 77에 가까워진 나이가 아찔하다.
본헌터의 삶에서 가장 아쉬운 미제의 발굴유해가 있다. 앞으로도 미제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한반도 남과 북 모두로부터 추앙받는 인물, 바로 안 의사다. 1909년 10월26일(러시아력으로 13일)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를 권총으로 저격해 사살한 그 안 의사 말이다. 안 의사 유해를 발굴하자는 이야기는 1948년으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역사가 길다. 1979년에는 북이 먼저 시도를 하기도 했다. 남쪽에서도 보훈처를 중심으로 정보를 수집해왔다. 내가 그 작업에 참여하는 행운을 누리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2008년의 일이다.
2006년 남과 북은 공동유해발굴 조사단을 구성하게 되었고, 나는 2008년 발굴단장으로 참여했다. 현장은 중국 요녕성 다렌시 뤼순구 일아감옥 구지대 뒷산인 원보산 일대였다. 이전에 여러 매장 추정 후보지가 있었으나 결국 안 의사의 사형이 집행된 뤼순감옥 바로 뒷산 한 곳으로 좁혀졌다. 사형집행 당시 뤼순감옥 간수장이었던 구리하라의 딸 후사코가 넘겨준 두 장의 사진이 결정적 단서였다. 한 장은 1911년 뤼순감옥 공동묘지에 열린 위령제를 찍은 것인데, 안 의사 묘가 표시돼 있었다. 다른 한장은 뤼순감옥을 뒤에서 찍은 희귀한 사진이었다.
뤼순 감옥 뒤의 원보산에서 뤼순감옥을 촬영한 사진. 1906년 촬영 추정된 것으로 뤼순감옥 간수장이었던 구리하라의 딸 후사코가 제공했다.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 보고서
뤼순감옥 간수장이었던 구리하라의 딸 후사코가 넘겨준 뤼순감옥 유해매장 추정지 표시 사진. 아래 방향으로 된 화살표가 안 의사 묘역을 가리킨다.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 보고서
2008년 3월25일부터 4월29일까지 2차에 걸친 발굴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당시 발굴현장에선 고층 아파트가 막 올라가던 참이었다. 중국 당국의 협조를 얻어 공사를 중단하게 했지만, 깎아놓은 산을 어쩔 수는 없었다. 이제는 현장에 고층 아파트가 완전히 들어섰고, 다시 발굴을 하기는 무망하다. 그럼에도 안 의사가 묻힌 매장지 위치를 최대한 과학적인 데이터를 동원해 확정적으로 도출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매장추정지에 대한 남북 공식 입장은 원보산이지만, 아직도 원보산 반대편인 둥산포에 안 의사가 묻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기에 그렇다.
뤼순감옥 사형보고서에 따르면, 안 의사는 1910년 3월26일 오전 10시4분 뤼순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고, 10시15분 절명이 확인되었으며, 10시20분 가로로 된 침관(寢棺)에 넣어진 채 운구되어 오후 1시경 감옥 묘지에 매장되었다. 그렇다면 뤼순감옥을 중심으로 10시20분부터 오후 1시까지 도달할 수 있는 거리는 어디인가. 당시의 뤼순 지도를 통해 변화되기 전 지형을 참고하고, 침관을 함께 든 사람들의 보폭과 시간을 계산하고, 감옥에서 시신이 나온 출구와 묘지로 향한 방향에 대한 증언 등 검증된 모든 조건들을 GPS와 연결해 시뮬레이션화할 필요가 있다. 나는 여전히 이에 대한 강렬한 의지가 있다. 돈이 꽤 드는 일이라 박근혜 문재인 두 정부에서 보훈처에 제안했으나 모두 거절당했지만 말이다.
나는 궁금하다. 본인의 평화주의를 무력의 정의를 통해 역설적으로 보여준 위대한 투사였던 안 의사는 지금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사실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야말로 2008년 이후 중국을 수차례 드나들면서 안 의사 유해발굴에 힘을 쏟게 한 동력이었다. 실물 뼈 확인이 더 이상 어렵다면 컴퓨터 기술을 접목해 가상현실에서라도 발굴에 성공하고픈 마음인 것이다.
2008년 남북한 및 중국쪽 조사단원이 함께 했다. 왼쪽서 두번째가 선주.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 보고서
국군 전사자와 민간인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할 때도 나는 같은 태도였다. 어떤 이들은 그러한 나의 학자적 탐구자세를 못마땅하게 여겼을지도 모른다. 나는 유해로부터 소리없는 증언을 듣고 싶었다. 데이터와 영감을 얻고 싶었다. 그걸 제대로 못하면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았다.
2000년, 국군 전사자를 발굴하던 첫 해였다. 치열한 낙동강 전투가 벌어졌던 왜관의 한 발굴현장에서 철모와 그 안에 들어있는 머리뼈를 발굴했다. 광대뼈의 구조와 턱의 형태, 치아로 볼 때 백인이었다. 철모는 소련제였다. 혹시 스탈린이 보낸 구 소련 군사고문단의 일원은 아니었을까. 그들이 낙동강 방어선까지 내려왔다는 역사적 증거는 없었다. 철저한 감식을 통해 그 증거를 찾을 수도 있는 기회였다. 지금에서야 통탄하는 바다. 그때는 일단 증거만 남기려고 했는데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일찍이 화장을 해버렸다. 사진도 필름 카메라로 엉성하게 남길 때였다.
왜관에서 온몸을 구부리고 죽은 전사자 유해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검증을 하지 못했다. 일각에서는 미군의 세균전 결과로 유행성 출혈염에 감염되어 죽었다고 주장했는데, 내가 볼 땐 미군 융단폭격에 의한 가능성이 높았다. 낙동강전선은 B-29의 가공할 만한 융단폭격이 산소를 말아올려 산소 부족으로 고통스러운 자세를 취했을 것이다. 좀 더 논쟁을 했어야 했다.
그곳 왜관에서 나온 수많은 북한 군인들을 파주 적군묘지로 보낸 일도 마음에 걸린다. 감식 결과 17~18세로 나온 북한군 유해들은 정규군이라기보다는 대부분 의용병으로 끌려온 남한 사람들이라고 보는 게 합당했다. 다부동 369고지와 칠곡군 328고지에서 이들은 맨 앞줄로 떠밀렸고 퇴각 때 가장 먼저 죽음을 맞았다. 북한군 복장과 견장, 소련제 소총이 나왔다고 하여 모두 북한군으로 처리하는 게 능사는 아니었다. 현충원에 모실 수 없다면 제3의 대안을 찾았어야 했다.
민간인 희생자 유해발굴에 관해서는 더 이상 시민참여 형태의 유해발굴단이 어려워졌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꼽힌다.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유해발굴의 주체로 서면서 발굴참여자에 관해 매장문화재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을 적용하고 있다. 조사기관은 이 법에 따라 규모·장비·인적 구성 등을 갖추어야 한다. 가령 발굴단의 중요직책은 문화재 관련 학과 출신이어야 가능하다. 내가 2023년 하반기부터 발굴작업 실무에 손을 뗀 이유이기도 하다. 나와 함께 10여년간 유해발굴 경험을 쌓아온 능력있는 친구들이 더 이상 발굴작업에 참여하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민간 쪽에서도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과 같은 전문기구를 만들어야 할 때다. 근거 법령을 위해선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 기본법에 이를 뒷받침하는 조문과 함께 관련 시행령을 만들면 될 것이다. 이를 통해 문화재 관련 기관이 아닌 전문가와 일반 시민들도 유해발굴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유해발굴 전담 민간기구가 생긴다면 서울 강북구 우이동 338번지에서처럼 국군유해 발굴하려다가 민간인 유해가 나왔다고 발굴장을 덮는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우이동에서의 그 일은 군인과 민간인 모두의 생명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는 국가의 직무유기였다.
마지막으로 가장 아쉬운 것은 뼈 그 자체다. 뼈가 없다. 아직도 연구 목적을 위해 뼈를 수집하는 일을 백안시하거나 폄하하거나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교수 시절 학교 당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300~400구의 유해를 학교로 들여와 콜렉션을 만든 적이 있다. 이 뼈로 학생들 실습을 했다. 그런데 정년퇴임과 함께 이 뼈도 학교에서 나가야 할 뻔 했다. 답답한 일이다. 여기까지만 하자. 이제 남은 이야기는 본헌터의 마지막 한 사람에게 넘긴다.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라는 책을 썼다. 2000년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관한 미군 비밀문서를 최초 보도했고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 한국어판과 일본어판, 베트남어판을 냈다. 베트남전에 이어 이번엔 한국전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