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디에츠 증후군’을 앓고 있는 은별이가 지난달 28일 오후 경기도 집에서 최근 덕질하고 있는 아이돌 최예나의 앨범을 보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울지 마, 울지 마 어린아이같이. 라라라라 라라라라. 웃는 게, 웃는 게 이기는 거라고. 예예.”
비가 오락가락하며 후덥지근하고 무더웠던 지난달 28일 낮, 경기도에 사는 은별(가명·11)이는 책상 위에 놓인 자그마한 ‘손풍기’ 하나에 의지하면서도 아이돌 최예나의 ‘직캠’ 영상을 보며 흥얼거리느라 더위를 잊은 듯했다. “아이돌 밴드 멤버가 되고 싶어요. 드럼을 배우고 싶고요.”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 은별이가 씩 웃었다.
오후 1~2시께 하교한 뒤 저녁 늦게 엄마(40)가 일을 마치고 귀가할 때까지 홀로 집에서 지내는 은별이에게 아이돌은 유일한 친구이자 안식처다. 엄마는 스마트폰에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하는 은별이가 걱정스럽고 또 미안하다. “부모가 필요한 나이인데 제가 새벽에 나가서 저녁 늦게 들어오니 하루종일 스마트폰 중독이 된 것 같아 미안해요. 저 없는 시간에 친구가 되어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은별이를 바라보던 엄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은별이에게 아이돌 ‘덕질’은 유일한 취미지만, 팬사인회 등 각종 이벤트에 참여하는 ‘대면’ 덕질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 은별이에게 지금 가장 하고 싶은 일을 묻자 “‘최애’ 아이돌 최예나 팬사인회에 가고 싶다”는 대답이 바로 돌아왔다. 그러나 은별이는 엄두를 못 낸다. 은별이는 신체 여러 부위 결합조직에 이상이 생기는 희귀질환인 ‘로이-디에츠 증후군’을 앓고 있다. 다리와 허리가 굽어져 잘 걷지 못해 절룩거리고 자주 주저앉는다. 굳어지는 다리근육과 함께 통증도 항상 은별이를 따라다닌다. 양반다리를 하거나 혼자서 양말도 신을 수도 없다. 지하철을 타고 팬사인회에 가는 걸 꿈도 꾸지 못한다. 초등학생인 은별이를 가장 속상하게 하는 시간은 체육 수업이다. 수업 때마다 늘 운동장 스탠드를 지키며 친구들이 뛰어노는 것을 지켜봐야만 한다. “친한 친구들이 체육 시간을 제일 좋아하는데 같이 못 할 때가 많으니까요.”
엄마가 은별이의 질환을 알게 된 건 유치원 때였다. 은별이는 제대로 걷지 못해 갑자기 넘어지거나 주저앉는 일이 많았다. 엄마는 은별이가 다칠까봐 안아서 등하교를 시켰다. 또래들과 달리 제대로 걷지 못해 원내 활동에 지장이 있다는 유치원 교사의 조언에 따라 검사를 받았다. 로이-디에츠 증후군, 이름조차 생소한데 의사는 완치가 어렵다고 했다. 그대로 방치했다가는 심장까지 위험해질 수 있어 정기적인 심장 검사와 재활운동, 도수치료로 발병 속도를 최대한 늦추는 게 관건이라고 했다.
문제는 돈이었다. 심장 검사 한번에 80만원이 들었고, 재활운동과 도수치료는 한번에 20만원이 넘었다. 지하철 등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어려운 은별이가 경기도 외곽에서 서울의 대학병원까지 가려면 택시비만 왕복 8만원이 들었다. 하지만 당시 은별이네 상황은 좋지 않았다. 은별이 아빠는 술을 마시고 오는 날이면 엄마를 폭행했지만 양육비와 생활비는 한푼도 주지 않았다. 엄마 혼자 어린 딸을 돌보며 파출부와 설거지, 전단지 아르바이트로 생활비와 치료비를 감당하기 쉽지 않았다. 심장 검사를 1년 이상 미뤄두기 일쑤였고, 돈이 들어올 때까지 재활치료는 기약 없이 미뤘다.
술 취한 아빠가 은별이에게 폭력적인 행동을 하고, 은별이 외할머니가 보는 앞에서 엄마를 때리며 결국 가족은 갈라졌다. 엄마는 아빠의 가정폭력을 경찰에 신고하며 이혼 절차를 밟았다. 법원에서 접근금지 명령 10년 결정이 내려졌다. “아빠 없는 자식이란 말을 듣게 할 수 없어서 지옥이라도 버텼는데 딸한테까지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소중한 은별이까지 생지옥에서 살게 할 순 없잖아요.”
‘로이-디에츠 증후군’을 앓고 있는 은별이와 엄마가 지난달 28일 오후 경기도 집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엄마는 시장 안 식당에서 주방 보조와 설거지를 하며 한달에 80여만원을 벌고 있다. 정부에서는 한부모 가정 아동양육비 20만원을 받는다. 아빠에게 매달 30만원의 양육비를 요구했지만 형편이 어렵다는 이유로 받지 못하고 있다. 100여만원으로는 생활비와 치료비를 감당하기에 역부족이어서 식당 일이 끝나면 직업소개소에 연락해 음식점, 호프집 설거지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는다. 은별이를 집에 혼자 두는 시간이 길어지는 탓에 아르바이트를 자주 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돈이 급할 땐 어쩔 도리가 없다. 거동이 불편한 은별이의 등하교 도우미 이용료로만 하루에 4만2천원이 든다. 등하교 보조에 드는 비용만 월급(80만원)과 맞먹는 것이다. 은별이가 혼자 있는 시간에 다치거나 굶기라도 할까봐 등하교 외에 돌봄 도우미까지 고용하면 비용은 100만원이 훌쩍 넘는다. 엄마는 매달 적자다.
최근에는 관리비와 공과금이 3개월 이상 밀리면서 더 연체되면 가스와 전기가 끊길 상황에까지 내몰렸다. 현재 사는 아파트는 외가 친척이 2년간 살 수 있도록 무상으로 제공했지만, 관리비와 공과금 등은 직접 내야 한다. 33㎡(10평) 임대아파트에 살다 99㎡(30평) 아파트로 이사 오니 30만~40만원에 이르는 공과금과 관리비 등을 감당하기 벅차다. 결국 엄마는 지난달 이달 월급을 가불해 해결하면서, 이달은 월급 한푼 못 받고 생계를 꾸리고 있다. 특히 예년보다 일찍 무더워진 날씨 탓에 엄마는 전기요금이 걱정이다. 로이-디에츠 증후군 탓에 은별이가 몸에 열이 많은데 이를 제때 식혀주지 않으면 심장 등에 무리가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로이-디에츠 증후군’을 앓고 있는 은별이가 지난달 28일 경기도에서 지역 아동보호전문기관 상담원에게 심리상담을 받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엄마가 무엇보다 가장 걱정하는 건 딸의 영양 상태다. 딸은 질환의 영향으로 또래들보다 유독 키가 크고 월경도 빠른 편이다. 167㎝로 키가 반에서 제일 크지만 몸무게는 41㎏에 불과한 저체중 상태다. 아침과 저녁을 혼자 챙겨 먹어야 하는데다 식비와 간식비 등의 부담으로 빵과 라면으로 식사를 때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평소에 라면을 주로 먹는 은별이가 언젠가 뷔페 한번 가서 마음껏 먹어보고 싶다고 하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라고요.”
성장 속도가 빠르면 뼈와 허리가 휘는 증상도 빠르게 진행될 수 있어 성장을 늦추는 호르몬 주사도 맞아야 하지만, 식비조차 빠듯한 현실 탓에 엄두도 못 내고 있다. 은별이가 다리가 아파 길거리에서 갑자기 주저앉거나 넘어질 때마다 엄마는 다리를 주물러 마사지하는 것밖엔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그때마다 은별이는 “치료 안 받아도 괜찮다”고 오히려 엄마를 다독였다. 아프다고 칭얼거려야 할 아이가 너무 빨리 커버린 것은 아닌지 엄마에게 죄책감이 밀려온다.
엄마도 은별이와 같은 질환을 앓고 있다. 그래서 엄마는 마음이 더 아프다. 은별이가 어떤 고통에 시달리는지 누구보다 잘 알아서다. 아직 은별이는 엄마도 같은 질환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은별이가 어른이 돼서도 여전히 아픈 자신을 보며 좌절할까봐 차마 말을 꺼낼 수 없었다는 엄마는 항상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자신이 겪는 고통을 하나뿐인 딸에게도 물려줬다는 자책감 때문이다. “저는 상체가 굽고 은별이는 하체가 굽은 상태예요. 그래도 저는 거동은 가능해요. 허리가 찌릿찌릿하게 아파오고 숨이 가쁘더라도 일을 나갈 수 있어요. 저는 한번도 치료를 받아보지 못했지만, 은별이라도 더 심해지지 않도록 꼭 치료를 받게 하고 싶습니다.”
엄마는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는 은별이 모습에 가장 큰 힘을 얻는다. 학교생활이 즐겁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현실을 잠시 잊는다. 이전 학교에서 은별이는 걸음걸이가 이상하다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했다. “학교에만 가면 너무 외롭다. 난 혼자다”라는 은별이의 말이 엄마의 가슴을 후벼 팠다. 엄마가 아침 일찍 일하러 간 사이 몰래 결석을 하기도 했다. 이제는 전학 간 학교에서 친구들이 생겼다며 엄마가 귀가하기 무섭게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놓는다. 한달치 월급에 육박하는 등하교 돌보미 비용이 엄마는 전혀 아깝지 않다.
‘놀이공원에 가서 하루종일 원 없이 노는 것.’ 엄마와 딸의 소박한 바람이다. 은별이는 아직 놀이공원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다. 남들에게는 평범한 일상이지만, 근육이 굳는 질환을 앓는 모녀에게 놀이공원은 사치다. 엄마는 “은별이가 놀이공원이나 워터파크에 가보고 싶다는 말을 종종 한다. 꾸준히 치료받아서 꼭 함께 가고 싶다”고 했다. 은별이는 아이돌처럼 멋진 춤을 자유롭게 출 수 있는 날도 꿈꾼다. “근육통 없이 최예나처럼 멋있게 춤추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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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 이후
<한겨레>와 월드비전이 함께한 ‘나눔꽃 캠페인’을 통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세계적인 발레리나가 되고 싶은 꿈을 가진
주은이 사연(<한겨레> 6월9일치 13면)이 소개된 뒤 총 847만6100원(7월4일 기준)의 정성이 모였습니다. 월드비전은 “주은이가 꿈을 잃지 않도록 따뜻한 마음을 보내주신 일시계좌 후원자 103분, 네이버 해피빈 후원자 999분께 감사드린다. 소중한 후원금은 주은이에게 잘 전달하겠다”고 전해왔습니다. 또 주은이의 안타까운 사연을 보고 발레용품 쇼핑몰 ‘이발레샵’에서는 주은이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토슈즈를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이 밖에도 주은이의 꿈을 응원해주시고 따뜻한 마음을 전해주신 모든 후원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장나래 기자
wi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