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태의 초·중딩 글쓰기 홈스쿨
고경태의 초·중딩 글쓰기 홈스쿨 15 /
[난이도 수준-중2~고1] 내 인생 최초의 문학은 아버지의 사진설명이었다. 아니 ‘사진설명’이라는 표현은 건조하다. ‘사진에세이’가 적절하다. 아버지는 당신의 아들 사진을 위해 손수 앨범을 만들었다. 마분지를 줄로 묶어 제본하고 각 사진들의 네 귀퉁이를 스티커로 고정했다. 그 옆에 사인펜으로 무언가를 끼적거렸던 것이다. “년 월 증조할아버지 산소에서”처럼 날짜와 장소만 밝히기도 했지만, 인화지에 담긴 상황을 시적으로 압축할 때가 더 많았다. 폭소를 터뜨리는 사진 옆에 적혀 있던 “햇살도 배꼽을 잡는다”는 마지막 문장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현학적이거나 난해하지 않은 수사로 장식된 사진앨범을 수도 없이 만지작거리며 어린 시절 언어 감각을 익혔던 것 같다.
괜히 추억을 늘어놓은 건 아니다. 과거를 회상하다 아이들에게 내줄 ‘글쓰기 숙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래, 내 인생의 사진 10장씩을 고르게 한 뒤 코멘트를 적게 하는 거야.’ 아빠의 지시가 떨어지자, 아이들은 거실에 10여권의 앨범을 펼쳐놓고 서너 시간을 끙끙거렸다. “아빠, 어떤 사진을 골라야 해? 기준이 뭐야?” “니들 마~음대로 하세요.”
은서는 먼저 유치원 때 소풍 간 사진을 골랐다. 갈대밭을 배경으로 친구 3명과 함께 웃고 있다. 코멘트가 코미디다. “갈대 속에서 귀여운 소녀 넷. 여경, 나, 유진, 가현이 손 맞잡고 웃고 있네요. 랄라라 랄라라.” 다시 쓰라고 했다. “랄라라- 랄라라- 귀여운 소녀 넷이 손을 맞잡으며 웃고 있네요. 랄라라 랄라라.” 다시! “귀여운 네 명의 소녀들이 모두 모두 손잡으며 나란히 나란히. 활짝 치즈 김치. 귀여운 네 명의 소녀는 대체 누구일까?” 헐, 나란히 나란히는 또 뭐냐. 한번 더! “여경이와 한유진과 가현이와 같이 손잡으며 웃고 있는 귀여운 소녀는 뉴규?” 크하하. 준석에게 써보라고 했다. 중딩은 수준이 다르겠지? 역시 달랐다. “까부는 놈, 명랑한 놈, 딴청 피운 놈, 이빠진 놈이 서로 손을 맞잡고 입 벌리며 관중들이 된 갈대 앞에서 합창하네요.”
은서가 쓴 대다수의 사진 코멘트는 “뉴규?”로 시작해서 “찰칵!”으로 끝났다. 이런 식이다. “○○의 한 놀이터에서 활짝 웃으며 놀이기구를 타고 있는 아이는 뉴규? (중략) 웃고 있는 그 틈을 타서 몰래 찰칵!” 중딩 준석은 노회하다고 느껴질 정도다. “낚인지 몇 년이던가. 하얀 수염을 하고 붉은 보따리를 맸지만, 짧고 검음이 확실한 눈썹과 구렛나룻은 훗날 내가 낚였음을 짐작케 하던가. 하지만 아직도 안 풀린 의문. 진짜 그 가짜 산타가 애들 선물을 다 샀는가?” 다섯살 때 유치원에서 파견한 산타할아버지에게 선물을 받는 사진이다. ‘산타의 신화’에 속았던 꼬맹이 시절의 어리석음을 한탄했다. 두살 아기 때의 사진엔 이런 글을 적었다. “마치 춤을 추듯 팔을 흔들며 강렬히 웃고 있는 나. 그런 날 조종하는 엄마. 엄마는 ‘슈렉 포에버’의 ‘피리 부는 사나이’인가?”
여러분도 ‘내 인생의 사진’ 10장을 고른 뒤 코멘트를 붙여보시라. 실용적인 글쓰기 훈련의 한 방법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재미있다. ‘추억을 찜쪄먹는 이미지 놀이’라 부르고 싶다. 어떻게 창의적인 말로 옮길지 고민하다 보면 이미지를 다양한 각도로 느끼고 분석할 줄 알게 된다. 이 작업을 끝낸 뒤엔 독일 작가 브레히트의 사진시집 <전쟁교본>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70여장의 전쟁 사진에 붙은 코멘트를 보면서 깨달으리라. 사진설명의 문학성을, 그 위대함을!
고경태 <한겨레> 오피니언넷 부문 기자 k21@hani.co.kr ※ 아이들이 쓴 글을 포함한 이 글의 전문은 아하!한겨레(ahahan.co.kr)와 예스24 ‘채널예스’에서 볼 수 있다.
[난이도 수준-중2~고1] 내 인생 최초의 문학은 아버지의 사진설명이었다. 아니 ‘사진설명’이라는 표현은 건조하다. ‘사진에세이’가 적절하다. 아버지는 당신의 아들 사진을 위해 손수 앨범을 만들었다. 마분지를 줄로 묶어 제본하고 각 사진들의 네 귀퉁이를 스티커로 고정했다. 그 옆에 사인펜으로 무언가를 끼적거렸던 것이다. “
고경태 <한겨레> 오피니언넷 부문 기자 k21@hani.co.kr ※ 아이들이 쓴 글을 포함한 이 글의 전문은 아하!한겨레(ahahan.co.kr)와 예스24 ‘채널예스’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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