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태의 초·중딩 글쓰기 홈스쿨 14
[난이도 수준-중2~고1]
청개구리는 무죄다.
장마철만 되면 엄마 무덤이 떠내려 갈까봐 서럽게 운다는 청개구리는 무죄다. 거꾸로만 행동했던 자신의 철없는 과거를 뉘우치며 눈물 흘리는 청개구리에게 손수건을 건네며 이런 말을 건네고 싶다. “꼭 네 잘못만은 아니잖아?”
엄마 청개구리는 혹시 잔소리꾼이 아니었을까. 꼬마 청개구리에게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강요했을지 모른다. 냇가에서 노는 게 훨씬 코드에 맞는데도, 엄마의 취향만을 고집하며 산으로 가라고 등을 떠밀었을 것만 같다. 그런 ‘꼰대 청개구리’ 같은 엄마 아빠들이 인간 현실세계에서 어디 한둘인가. 어린이와 청소년들이여, 꼬마 청개구리에게 돌을 던지지 말라.
그러고 보니 나도 자라면서 “청개구리 같다”는 말을 종종 들었다. 돌이켜 보면, 부모님이 잔소리를 하며 보채는 일은 재미가 없었다. 자꾸 하라고 말할수록, 더 하기가 싫었다. 절대 하지 말라고 하면, 몰래라도 하고 싶은 욕구가 치밀었다.
잡담이 길어졌다. 오늘은 ‘능동’과 ‘수동’에 관한 이야기다. 무슨 일이든 능동적으로 하면 신난다. 수동적으로 하면 금방 지루해진다. 남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창의적인 발상이 나오기 어렵다. 자발적인 아이디어는 능동적으로 일할 때 쏟아진다. 사장님의 음모(!)가 아니라는 전제 아래 “월급쟁이 마인드를 버리라”는 충고는 모든 직장인들이 ‘능동’을 위한 금언으로 새겨들을 만하다.
우리 집 중딩 준석만 해도 그렇다. 언젠가부터 ‘드래건 마니아’가 됐다. 종이로 수십 가지 용의 입체모형을 만들고, 용에 관한 소설도 집필중이다. 용에 관해서라면 밤잠을 안 자고 뭐든지 한다. 내키지 않는 숙제나 공부엔 온갖 인상을 쓰며 시늉만 내는데 말이다. ‘능동’은 힘이 세다. 한데 다음 문장들은 용이 승천하다가 소화불량으로 트림하는 소리 같다. “<디 워>에서 등장한 선한 용인 한국 용을 따라 그려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따라 그리기로 하였다. 그러나 쉽게 그려지지 않는다. 디자인이 수천 번 더해지고 있다.” “아직도 완결이 완벽히 지어지지 않은 한국 용을 완벽히 재현해 내고 싶다.” 능동적으로 용 작업을 하면서도 그와 관련된 글엔 ‘수동’ 천지다. 쉽게 그려지지 않는다? 수천 번 더해지고 있다? 완벽히 지어지지 않은? 그렇다. 오늘의 진짜 주제는 능동태와 수동태다. 삶을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문장도 ‘능동태’로 쓸 것이라고 믿는다. ‘수동태’를 즐겨 쓰는 사람은 ‘수동적’으로 살 것만 같다. “방학이 됐지만 섭섭한 부분도 있다. 친구들과 선생님과 한 달 동안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핸드폰도 고쳐져서 전화를 해서 만나 놀면 되지만.” 이건 초딩 은서의 수동태다. 주어는 없다. 핸드폰은 스스로 고쳐졌단 말인가. 준석과 은서의 수동태를 몇 개 지적했지만, 양호한 편이었다. 꼬투리를 잡으려고 모든 글을 샅샅이 뒤졌지만 몇 개밖에 건지지 못했다. 그만큼 덜 오염됐다는 이야기다. 사실 뭔가 지식인의 언어를 구사하려는 이들의 글에서 수동태 문장을 종종 발견한다.(‘발견된다’를 지양하란 말씀이다) <유혹하는 글쓰기>의 저자 스티븐 킹은 “수동태로 쓴 문장을 두 페이지쯤 읽고 나면-이를테면 형편없는 소설이나 사무적인 서류 따위-나는 비명을 지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수동태는 나약하고 우회적일 뿐 아니라 종종 괴롭기까지 하다”고 말했다. 수동태를 비판하기 위해 쓴 이 글을 읽으며 누군가 비명을 지르지 않기를 기원한다. 고경태 <한겨레> 오피니언넷 부문 기자 k21@hani.co.kr ※ 아이들이 쓴 글을 포함한 이 글의 전문은 아하!한겨레(ahahan.co.kr)와 예스24 ‘채널예스’에서 볼 수 있다
우리 집 중딩 준석만 해도 그렇다. 언젠가부터 ‘드래건 마니아’가 됐다. 종이로 수십 가지 용의 입체모형을 만들고, 용에 관한 소설도 집필중이다. 용에 관해서라면 밤잠을 안 자고 뭐든지 한다. 내키지 않는 숙제나 공부엔 온갖 인상을 쓰며 시늉만 내는데 말이다. ‘능동’은 힘이 세다. 한데 다음 문장들은 용이 승천하다가 소화불량으로 트림하는 소리 같다. “<디 워>에서 등장한 선한 용인 한국 용을 따라 그려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따라 그리기로 하였다. 그러나 쉽게 그려지지 않는다. 디자인이 수천 번 더해지고 있다.” “아직도 완결이 완벽히 지어지지 않은 한국 용을 완벽히 재현해 내고 싶다.” 능동적으로 용 작업을 하면서도 그와 관련된 글엔 ‘수동’ 천지다. 쉽게 그려지지 않는다? 수천 번 더해지고 있다? 완벽히 지어지지 않은? 그렇다. 오늘의 진짜 주제는 능동태와 수동태다. 삶을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문장도 ‘능동태’로 쓸 것이라고 믿는다. ‘수동태’를 즐겨 쓰는 사람은 ‘수동적’으로 살 것만 같다. “방학이 됐지만 섭섭한 부분도 있다. 친구들과 선생님과 한 달 동안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핸드폰도 고쳐져서 전화를 해서 만나 놀면 되지만.” 이건 초딩 은서의 수동태다. 주어는 없다. 핸드폰은 스스로 고쳐졌단 말인가. 준석과 은서의 수동태를 몇 개 지적했지만, 양호한 편이었다. 꼬투리를 잡으려고 모든 글을 샅샅이 뒤졌지만 몇 개밖에 건지지 못했다. 그만큼 덜 오염됐다는 이야기다. 사실 뭔가 지식인의 언어를 구사하려는 이들의 글에서 수동태 문장을 종종 발견한다.(‘발견된다’를 지양하란 말씀이다) <유혹하는 글쓰기>의 저자 스티븐 킹은 “수동태로 쓴 문장을 두 페이지쯤 읽고 나면-이를테면 형편없는 소설이나 사무적인 서류 따위-나는 비명을 지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수동태는 나약하고 우회적일 뿐 아니라 종종 괴롭기까지 하다”고 말했다. 수동태를 비판하기 위해 쓴 이 글을 읽으며 누군가 비명을 지르지 않기를 기원한다. 고경태 <한겨레> 오피니언넷 부문 기자 k21@hani.co.kr ※ 아이들이 쓴 글을 포함한 이 글의 전문은 아하!한겨레(ahahan.co.kr)와 예스24 ‘채널예스’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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