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두 시간 영어에 목숨 걸지 마세요. 김영훈 기자
[아이랑 부모랑]
서울대 이병민 교수가 말하는 조기영어교육 ‘오해와 진실’
일상에서 써야 하는 입장과 수업때만 하는 것은 달라
이민자 샘플링 어불성설…시작 학령 중요하지 않아
서울대 이병민 교수가 말하는 조기영어교육 ‘오해와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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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영어교육에 대한 끝모를 불안감의 뿌리는 ‘조금만 더 투자하면 우리 아이도 영어를 잘할 수 있다’는 생각에 닿아 있다. 자신은 그동안 살아오면서 영어 배우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으면서도, 정작 자기 자녀는 쉽게 영어를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자식 영어 잘하는 게 소원인 대다수의 부모들에게 앞다퉈 이런 환상을 심어주는 이들은 사교육 업자들이다. 그들은 아이를 학원에 보내면 머지않아 영어가 될 것처럼 꼬득인다. 옆집 아이가 2시간짜리 학원에 다니면, 1시간짜리 학원에 보내는 부모는 마음이 조급해진다. 거의 공포 수준에 이른 ‘영어 불안증’에서 벗어나는 길은 없을까?
지난 16일 교육운동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주최한 ‘사교육 걱정 희망 찾기 국민교실-영어 사교육 광풍에서 살아남기’ 강좌는 이런 고민의 해법을 모색해 보는 자리였다. 9일에 진행된 ‘영어몰입교육-오해…정직한 대답’에 이어 두번째로 열린 이날 강좌의 주제는 ‘영어조기교육-거품 빼고 진실 캐기’. 40여명의 학부모와 교사들이 참석해 이병민 서울대 영어교육과 교수의 강의에 귀를 기울였다.
이 교수는 학교와 학원에서 영어를 한두 시간 더 배우면 누구나 영어로 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실을 벗어나면 일상생활에서 영어를 쓸 일이 전혀 없는 한국 사회에서, 누구나 쉽게 영어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은 환상일 뿐이라는 얘기다. 이런 점에서 “고교만 졸업해도 웬만한 생활영어를 거침없이 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이 이 교수의 설명이다.
이 교수는 모국어를 포함해 언어를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으려면 ‘엄청난 양의 노출’과 ‘구체적인 상황에서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이라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는 아기가 말을 배우는 과정을 생각하면 쉽게 알 수 있다.
“언어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보면, 일상생활에서 영어에 노출되지 않고 학교에서 영어를 배워 의사소통이 가능한 수준에 이르는 데 1만1680시간이 걸립니다. 매일 하루에 2시간씩 배워도 16년이 걸린다는 얘기죠. 남의 나라 말을 배운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좀더 어릴 때 배우기 시작하면 달라지지 않을까? 이 교수는 손사래를 쳤다. 일찍 시작할수록 영어를 잘 배울 수 있다는 주장은 실증적 증거가 없으며, 일부 학자와 사교육 업자들이 만들어 낸 일종의 ‘신화’라는 것이다. 영어조기교육의 이론적 배경은 일정한 나이가 지나면 언어를 배우기가 어렵다는 ‘결정적 시기’ 가설이다. 학계에서는 이 결정적 시기를 대체로 사춘기(12살 안팎)로 잡고 있다. 여기서 염두에 둬야 할 것은 결정적 시기 가설은 모국어(첫번째 언어) 습득과 관련된 이론이라는 점이다. 태어나서 12살 무렵까지 독방에 갇혀 지내거나 오지에서 혼자 큰 아이의 경우, 그 이후에는 말을 가르치려 해도 배우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국어를 습득한 뒤, 다른 언어(두번째 언어)를 배우는 데에도 결정적 시기가 있을까? 이 교수는 “두번째 언어의 경우 어느 시기를 지나면 배울 수 있는 능력이 확 떨어지는 결정적인 ‘전환점’은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첫번째 언어 습득 때처럼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특히 영어 습득 능력과 나이의 관계를 다룬 연구들이 모두 영어권 국가로 이민을 간 아이들을 대상으로 이뤄진 것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실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영어를 쓰는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영어를 배우는 것과 우리나라처럼 일상생활에서는 영어를 전혀 쓰지 않고 교실에서 순전히 ‘외국어’로서 영어를 공부해야 하는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는 설명이다. 이 교수는 “학교와 학원에서 일주일에 몇 시간 정도의 수업을 통해 영어를 배워야 하는 상황에선 언제 시작하느냐 하는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며 “외국 논문들을 보면 교실에서 외국어로 영어를 배울 때는 오히려 초등학교 고학년 때 시작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견해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영어를 배우는 데 결정적 시기가 없다면, 영어에 한 맺힌 한국 부모들이 영어를 못하는 이유는 뭘까? 이 교수는 “실제로는 살아오는 동안 영어라는 언어가 절실하지 않았고, 따라서 배우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영어 학습에 대한 동기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영어 원어민 수준의 영어실력을 갖추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면, 어른이 된 뒤에도 당장 영어가 필요해서 배우고자 한다면 못배울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이날 강의를 들은 초등학생 학부모 최성순(45)씨는 “한국에서 영어를 배운다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얘기를 듣고 절망감이 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열심히 학원 다니는 옆집 아이나 학습지만 하는 우리 아이나 ‘오십보 백보’라는 생각이 드니까 한결 여유가 생긴다”고 말했다. 안혜용(40)씨도 “주변의 유혹에서 벗어나, 아이가 영어를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이 들 때까지 닦달하지 않고 기다려줄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 교수의 세번째 강의는 23일 오후 6시 ‘사교육걱정없는세상’(cafe.daum.net/no-worry) 세미나실에서 ‘영어 사교육 광풍-탈출구는 없는가’를 주제로 열린다.
이종규 기자 jklee@hani.co.kr
이병민 서울대 영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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