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석 소아정신과 전문의·행복한아이연구소장
서천석의 행복 비타민 /
오늘은 한국의 아빠들에게 한마디 하고 싶다. 물론 예전에 비하면 많이 변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무슨 배짱인지 변화의 속도가 너무 늦다. 아직도 아이 키우기를 엄마에게 맡기고 ‘가장’이라는 허울 뒤에 숨는 아빠들이 많다. 숨어만 있으면 그나마 다행인데 가끔 가장의 권위를 세우려다 풍파도 일으킨다. 아이가 처한 현실을 제대로 고민해 보지도 않은 채 자신의 경험에 비춰 ‘올드 패션’의 해결법을 잔소리하듯 부인에게 툭툭 던지는 아빠. 꾸지람에 별 반응을 하지 않는 아이의 모습에 버르장머리 없다고 흥분해서 자존심 대결을 벌이는 아빠….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아이 키우기에도 공짜는 없다. 아이에게 내가 한마디 하고 싶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다면 아이와 같이 시간을 보내야 한다. 사람은 자기와 친밀감을 형성하지 않은 사람이 개입하려 하면 거부감을 갖는다. 아이의 기억에 남는 아빠이고 싶다면 결국 아이와 교류가 필요하다.
아이랑 꼭 많은 시간을 보내라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아빠들은 너무 바쁘다. 새벽에 출근해서 한밤중에 퇴근시키는 가정파괴적인 행동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국가지도자가 있는 나라이니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자신이 아빠이고 싶다면 최소한 아이의 어려움이 있을 때 느낄 수 있어야 하고 옆에서 관심을 기울여줄 수 있는 정도가 되어야 한다. 누구나 어려울 때면 옆에 누군가 있어주기를 바란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스무살이 된 아이가 어느 날 자신에게 “제가 어려울 때 아빠가 뭘 해주셨는데요?” 하고 물었을 때 “너 먹여 살리느라 바빴다”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궁색하다.
어떤 아빠는 아이가 아직 어려서 가까이 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어릴 때 가까워지지 않은 부모 자식 관계는 나이 들어 회복하기가 더욱 어렵다. 아빠와 마음이 서로 연결되는 느낌을 갖고 자란 아이만이 자신의 자아가 강해진 뒤에도 아빠를 자기에게 중요한 인물로 생각한다. 그저 좀 무섭고 돈을 대주는 인물이 아닌, 정말 중요한 인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아이가 5학년이 되었다면 어쩌면 이미 늦었을지 모른다.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아빠들이 너무나 안쓰럽다. 한국 아빠 넷 중 셋은 나이를 먹으면서 결국 가정에서 소외되고 인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가족을 잃어버린다. 그렇게 늙어가고 그렇게 인생을 마치고 싶은가? 그렇지 않다면 지금 당장 아이와 약속을 잡자. 일주일에 한번이라도 아이와의 약속을 수첩에 적어 두자. 퇴근 길 술 한잔 하자는 동료의 유혹, 늘어지게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고 싶은 유혹을 이기고, 뭘 가르치고 확인하려는 마음도 버리자. 그냥 아무 목적 없이 아이가 좋아하는 대로 같이 시간을 보내 보자. 당신에게 ‘아빠’라는 새로운 인생이 열릴 것이다.
서천석 소아정신과 전문의·행복한아이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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